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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절 숲들이

라이프(life)/풍수지리

by 굴재사람 2010. 1. 6.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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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이 아름다운 절 숲들이

 

 

흔히 불교를 숲의 종교라고 말한다. 절이 숲속에 있다고 해서가 아니다. 붓다의 일생이 숲과 함께했고, 붓다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 내용이 그러했고, 2500년 동안 그분의 뒤를 따른 많은 수행자들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숲이란 단순한 나무들의 집합이 아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살다 가는 생명의 터전이요, 생태의 공간이다. '불살생' '금육' '방생' 등 불교의 전통도 거기서 비롯되었고, 불교를 '생명의 종교'라고 하는 까닭도 거기 있다. 1600년 한국불교도 숲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신라의 구산선문이 모두 산중의 숲속에서 터를 잡았고, 그 선불교 전통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1929년 일제가 우리 산림자원을 관리, 수탈하기 위해 자생수종 분포조사를 할 때 1333개소의 사찰림을 표본으로 삼았다. 사찰림이 깊은 산중에 있고, 마을 산에 비해 잘 관리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스님들이 숲을 얼마나 정성들여 보전해왔는지를 잘 말해준다. 지금도 사찰림은 우리나라 산림의 지표가 되어 있다.

지난 2002년부터 산사의 숲을 찾아다녔다. 지자체의 관광개발과 사찰 자체의 불사 등으로 위기에 처한 사찰림(寺刹林)을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북으로는 고성 금강산 건봉사부터 남으로는 해남 땅끝 미황사와 바다 건너 한라산 관음사까지, 바다 위에 뜬 서산 간월암에서 해발 1244m 설악산 봉정암까지, 전국의 108개 사찰숲을 모니터링했다.

그렇게 7년 동안 돌아본 사찰숲은 부분적으로 훼손·교란된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건강한 생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1000여년 동안 인위적 간섭이 심했을 텐데도 자연숲과 천연덕스럽게 잘 어울려 있다는 것은 옛 스님들이 숲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찰숲뿐만 아니라 남원 행정리 마을숲을 비롯해 전국 유수한 마을숲들도 스님들의 안목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옛 스님들이 숲을 잘 지켜온 노하우의 밑바닥에는 생태풍수가 있다. 풍수가 과학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풍수적 인식과 삶의 태도가 자연환경을 지켜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사찰숲 탐방에서 깨달았다. 홍천 수타사는 '공작포란(孔雀抱卵)' 형국이다. 그 말 속에는 공작이 알을 품을 수 있게, 양쪽 날개깃에 해당하는 좌우의 숲을 튼실하게 보전하라는 후학들에 대한 간곡한 가르침과 소망이 깃들어 있다.

사찰 전각들을 화재에서 지키려 옛 스님들이 고안해낸 것이 '내화수림대(耐火樹林帶)'이다. 이는 산불이 절로 내려오지 못하게, 절에서 난 불이 산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전각 뒤에 일정한 공간을 비워두고 거기에 동백나무 등 화재에 강한 나무들을 심어 방화차단벽으로 조성한 것이다. 나주 불회사 숲을 비롯해 남도의 사찰에서 아름다운 내화숲을 만날 수 있다.

이제 미학이나 역사적 관점만이 아니라 생태적인 시각으로도 문화유산을 보았으면 한다. 오랜 전각들은 다양한 나무로 만들어진 또 다른 '숲'이다. 고창 선운사 만세루의 가구는 모두가 휘어지고 비뚤어져 있다. 심지어는 마루까지도 굽은 나무들이다. 이런 전각들은 스님들이 숲속에 살면서도 나무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숲윤리의 징표다.

그러나 지금 그윽하던 전국 곳곳의 절골 숲길들이 넓은 차도와 주차장으로 바뀌며 거덜이 나고 있다. 부처님 코앞에까지 시멘트길을 내고, 전각들의 몸집을 살찌우고, 외래수종들까지 함부로 심고 있다. 생태 경관이 말이 아니다. 관광을 위해서도, 개발을 위한 불사(佛事)가 아니라 정말 '그림이 되는' 불사를 해야 한다.

 

/ 김재일 사찰생태연구소 대표환경부 국립공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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