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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運命)

라이프(life)/명리학

by 굴재사람 2009. 4. 1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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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하 한생각>
운명(運命)
1.
요즘 점집들에는 젋은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고 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되는 일은 없고
일이 풀릴 전망도 없고
그래서 답답한 심사에서 자신의 운명을 점쳐보고 싶어서 일 것이다.
언제쯤이면 자신의 운이 좋아질까 알고 싶어서일 것이다.

흔히 운명(運命)이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 궤적이 정해져있는 것으로 그렇게 이야기한다.

실은 그렇지 않다.
운명이란 것은 자신의 관성일 뿐이다.
자신의 사고와 행동, 관계방식들,
요컨대 스스로의 삶의 방식이 만들어낸 관성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 관성이 강고해져서 자신의 굴레가 되고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서 운명이 되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도 무의식(無意識)이라는 용어를 쓴다.
참으로 기묘한 용어가 아닌가?
자신의 의식이면서도
정작 자신도 의식할 수 없기에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운명이란 용어도 그와 마찬가지다.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만든 줄 모르고
‘자기 탓’이 아닌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렇게 신비화 해버린 것이다.


2.
운명이란 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자신의 관성을 차고 나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궤도수정을 의지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운명이란 것은 없다.
그러나 그 관성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운명이 그 사람을 좌우한다.

달리 말하면,
자기 관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에게는 운명은 없다.
그러나 관성에 마냥 끌려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관성이 운명이 된다.

운명의 주인이 되는가,
아니면 운명이 주인이 되는가의 차이일 것이다.

3.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거두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것을 뿌려야 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점에 냉정하지 못하다.
거두고 싶은 것은 많지만
뿌리는 고통은 적게 하려고 한다.
자신의 바꾸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관성을 차고 나올 그만한 노력은 피하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기대치에 미달한다.
그 기대치의 미달이라는 것은
운명 탓이 아니다.
뿌려야 할 것과 뿌린 것의 괴리가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4.
정말 거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늘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연 이렇게 해도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 결과에 합당한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미래를 말해주는 것은 점쟁이가 아니라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닐까?
운명의 소리를 찾아 헤맨다면
운명은 점점 나를 조여 올 것이고
지금 헤매는 그 모습이 또한 미래의 내 모습일 것이다.

미래라는 것에는 어떤 요행수도 없다.
아닌 말로 운이 좋은들 무엇을 할까?
운이 좋다 해도
운을 자기 것으로 만들 노력이 없다면 그 또한 허사다.
이를테면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거두는 운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뿌리지 않은 자에게는 거둘 것이 없다.
아무리 가을이 된들 뿌리지 않은 들에서 거둘 것이 있겠는가?

/배영순(영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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