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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와 정신의 상관관계(7)-대승적인 건강관

라이프(life)/오행생식

by 굴재사람 2009. 4. 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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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하차서 건강이야기>
육체와 정신의 상관관계(7)-대승적인 건강관

7. 건강이란 개념은 대승적인 것이다

이상에서 오장을 중심으로 육체와 정신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았다. 이것을 상식 선에서 잘 익혀 놓으면 자기 관리나 대인 관계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데도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공연히 상처를 주거나 또 상처를 받는 일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점은 분명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여러 가지 병든 유형들, 좋지 않은 유형들의 사람을 대할 때 고정관념을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라도 변화하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너는 이런 인간이야'라는 고정관념을 갖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변화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고정관념은 일을 그르치고 인간관계, 사회적 관계도 손상시키게 된다는 점 유의했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점을 놓쳐서 안될 것 같다. 흔히 몸을 잘 챙긴다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위장에 좋고 간에 좋고, 몸에 좋은 음식은 다 찾아다니는데 정작 위장에 나쁘고 간에 나쁜 생활관습이나 심리상태를 바로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신통한 약이나 음식에 대해서는 잔뜩 욕심을 내면서도 정작 건강에 이로운 생활방식은 외면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모순적인 건강관리를 고집하고 이른바 저효율 고비용의 건강법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우매함에서는 빨리 벗어났으면 한다.

이제는 생활의 건강성이라는 문제, 생활건강의 회복을 통해서 건강을 회복하는 지혜에 눈을 떴으면 한다.  질병은 몸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병들면서 몸이 병들어간다는 것, 그 점을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약을 먹고 보양제를 먹고 또 주사를 맞는 그런 치유법 보다 생활건강에서 바로 육체적 건강을 회복하는 치유법이 더 고차적인 방법이다.

만약 육체와 정신의 상호연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고 그래서 자신의 의식상태를 조율할 수 있고 생활을 관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질병의 치유가 가능하다. 최소한 치유에 일조를 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른바 고전에서 말하는 양생(養生)이란 것도 그런 것이다. '마음의 병을 고쳐야 한다'는 것, 그냥 무심코 흘려 들을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바로 쓴다' '마음을 곱게 쓴다'는 것은 관념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말 마음을 바로 쓰고 마음을 곱게 쓴다면 생활로 드러나야 한다. 바른 생활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타락이라는 것의 정의는 아주 간명한 것인데, 마음과 몸이 따로 놀면 그것이 타락이다. 마음에 없는 짓을 하면 그것이 타락이다. 그때 우리의 몸도 마음도 병이 드는 것이다. 그 점을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그래서 마음을 잘 쓰고 있는지 아닌지는, 생활이 말해주는 것이다. 달리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정말 마음을 고쳐먹었는가는 생활이 말해주는 것이다. 마음은 결코 관념이 아니다.

필자는 줄 곧 '관계적 합리성'을 강조해 온 바다. 그러나 '관계적 합리성'이란 것은 나와 타인과의 관계, 나와 사회와의 관계라는 차원 이전에 나의 몸과 마음이라는 상관관계부터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미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이 관계적 합리성을 상실하고 있는 바에야, 나를 넘어선 관계적 합리성의 문제를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그렇다, 내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 기분에 끌려 다닌다면, 그럴 정도로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와 절제가 어렵다면 더구나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면, 주변사람과의 관계적 합리성을 회복하기는 어렵다. 각자 자기 기분대로 자기 감정대로 서로를 만나고자 한다면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 육체와 정신과의 상관관계 >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것, 수신(修身)의 일차적 관건도 이것일 것이다. 몸과 마음의 관계적 합리성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다. 관계적 합리성이 회복되는 반경의 확장, 그것이 수신 - 제가 - 치국 - 평천하로 단계화한 것일 터이다.

그래서 '나'를 넘어서 그리하여 나와 너의 만남을 위하여 나와 너의 소통을 위하여,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장애들을 극복하는 문제를 비켜갈 수 없는 것이다. 건강이란 문제도 그런 차원에서 생각했으면 한다.

다시 말하지만, 건강을 말할 때, 우리는 '내 건강'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내 건강'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나'란 것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나'라는 것 자체가 관계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건강이란 것, 나의 관계들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 관계성을 부정하고 '나만의 건강'을 말할 때 이미 병든 것이다, 병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관계의 단절과 자폐화를 의미하고 있는 '나만의 건강'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 만의 건강'도 아니고 '몸만 건강하자'는 이런 건강이 어떻게 성립 가능하겠는가?

앞에서 생활건강을 말해지만 생활이란 것 자체가 관계적이다. 그러니 생활건강이란 것은 관계적 합리성의 회복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건강이란 개념 자체가 대승적인 개념이다. 소승적인 건강개념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대승적인 건강관이란 것이 먼 이야기 같고 소승적인 건강관이 오히려 귀에 솔깃할 지 모르지만, 투병과정에서 과연 어느 쪽이 건강회복의 속도가 빠른 것일까? 아마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점에서 필자는 단연코 말할 수 있는데, 정말 대승적인 관점에 섰던 사람들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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