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꽃잎 가장자리가 흙빛으로 타들어가는 게 보입니다.
벌써 꽃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아침에는 새들이 날아와 꽃술과 흰 꽃잎을 부리로 톡톡 쪼아 먹는 게 보였는데
오늘 저녁에는 꽃이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꽃을 보는 나만 '어느새'라고 말하는 것이지
꽃은 희고 고운 꽃봉오리를 피워놓고 그 사이에 많은 걸 겪었습니다.
봄비가 퍼부은 날도 있었고, 바람이 심하게 불고 황사 몰려온 날도 있었으며,
며칠씩 흐린 날이 이어지기도 했고, 엊그제는 산 너머에 눈이 내렸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꽃샘추위를 견디느라 힘든 밤에도 나는 그저 꽃이 늘 피어 아름답게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비와 바람 황사와 추위 속에서 언제나 환하게 피어 있는 꽃은 없습니다.
그 속에서도 꽃을 지키고 그 꽃을 푸른 잎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혼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보아주는 이가 있건 없건 꽃은 저 혼자 곱게 피었다 소리 없이 돌아갑니다.
뒤뜰에 백목련 피었다 지는 시간에
창가에 모과나무 꽃순이 파란 손을 펼치며 앙증맞게 자라 오르고 있습니다.
모과꽃도 눈에 뜨일 듯 말듯 그러게 피어날 겁니다.
향기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있다가 갈 겁니다.
저도 그렇게 있고 싶습니다.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모과꽃처럼 살다 갔으면
꽃은 피는데
눈에 뜨일 듯 말 듯
벌은 가끔 오는 데
향기 나는 듯 마는 듯
모과꽃처럼 피다 갔으면
빛깔로 드러내고자
애쓰는 꽃 아니라
조금씩 지워지는 빛으로
나무 사이에 섞여서
바람하고나 살아서
있는 듯 없는 듯
---「모과꽃」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이 다 그렇듯 저도 "눈에 뜨일 듯 말 듯"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드러내고자 / 애쓰는 꽃 아니라 / 조금씩 지워지는 빛으로" 있다가 가고 싶습니다.
숲의 모든 나무가 그렇듯 "있는 듯 없는 듯" 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저 봄이면 이렇게 조촐한 꽃 하나 피워놓고 있다가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소월이 「산유화」에서 이야기한 '저만치' 거리를 두고 서 있고 싶습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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