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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열매

글모음(writings)/꽃과 나무

by 굴재사람 2009. 3. 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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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열매 - 도종환
밤사이 겨울비가 내리고 난 뒤에 산수유 열매는 더 고운 얼굴이 되었습니다. 
열매마다 몸 끝에 빗방울로 만든 영롱한 보석 하나씩을 달고 서 있습니다. 
다가가 흔들면 아름답고 투명한 소리가 날 것 같은 수정알 하나씩을 
매달고 있는 열매들은 얼굴 한쪽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눈이 내리면 눈을 다 털어버리지 않고 머리와 이마에 하얗게 이고 있습니다. 
차갑고 시린 눈이 천천히 녹는 동안 열매 속까지 속살이 빨갛게 물듭니다. 
늦가을에서 한겨울까지 산수유열매는 붉게붉게 자신을 태웁니다. 
한 해가 가고 새 해가 오는 동안에도 산수유열매는 홀로 산 속에서 
자신을 붉게 지키고 있습니다. 
굳은 씨열매는 더 단단해 지고 붉은 얼굴은 더 빛이 납니다.
산수유나무는 눈보라와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는 산 속에서 자신을 지킨 
그 힘으로 봄이 오면 가장 먼저 노란 꽃을 피웁니다. 
크고 화려한 꽃이 아니라 노랗고 아주 작은 꽃 이삼십 개 정도가 모여야 
겨우 한 송이가 되는 그런 꽃을 피웁니다. 
겨울을 이기고 있던 안간힘이 그렇게 꽃을 피우는 거지요. 
이파리를 낼 힘도 없는 상태에서 노란 꽃을 피워 놓고 
여기저기 이제부터 봄이라고 알리는 산수유꽃의 나팔소리를 들으며 
해마다 산도 사람도 겨울의 긴 잠에서 깨어납니다. 
하얗게 눈에 덮인 겨울 산속에서 빨간 산수유열매가 빛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산수유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먼저 꽃피는 이유를 짐작합니다. 
한겨울에도 깨어 있으려 애를 쓰는 생명력, 작은 열매 하나를 지키기 위해 
안으로부터 거듭나고 거듭나는 인고의 시간, 생의 가장 춥고 모진 날들 앞에서 
단련하는 작고 단단한 정신이 꽃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오래 깨어 있었으므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생명의 열매를 먹고 산새들이 겨울을 나는 게 아닐까요? 
정신이 허약한 사람들이나 피가 잘 돌지 않는 사람들에게 산수유열매가 
약이 되는 것도 열매 속에 들어 있는 이런 뜨거움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일자리는 줄어들고, 하나둘씩 문을 닫는 가계들이 늘어나고, 
갈수록 살기는 어려워지는데 날은 점점 추워지는 겨울입니다. 
이 겨울 산수유열매를 바라보며 저 열매 같이만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생각을 합니다.   
- 도종환 시인의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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