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레이블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있는지. 레이블에는 그 와인을 만든 사람의 정서가 담겨 있다. 프랑스 와인에는 대부분 그들 와이너리를 대표하는 성이 그려져 있다. 이 또한 와이너리의 오랜 역사를 상징하는 것이다. 요즘에 와서는 단순하면서도 예술적 감각이 느껴지는 모던한 디자인의 레이블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가끔은 철학적 생각에 잠기게 도와준다.
담당=서정민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글=김혁 포도 플라자 관장
청년의 꿈 ‘붉은 점’
1 피아니로시 솔루스 Pianirossi Solus
더 이상 단순할 수 없는 레이블이다. 끝없이 펼쳐진 평온처럼 조용한 순백의 종이 위에 덜렁 찍혀 있는 붉은 점 하나. 그 속에 숨은 의미는 무엇일까. 이 와인이 만들어진 데는 한 청년의 꿈이 어려 있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토즈(Tod’s)의 최고경영자(CEO) 스테파노 친치니는 대학 때부터 자신의 와인을 만들고 싶어 했고, 그 꿈을 실현시킨 것이 바로 이 와인이다. 그는 젊은 시절 많은 돈을 벌어 토스카나 몬탈치노 남쪽 마렘마 지역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줄 포도밭을 찾았다. 그리고 포도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양조장을 짓고 자신이 머물 집도 한 채 마련했다. 이곳의 토양은 산화철을 많이 갖고 있어 붉은색을 띤다. 친치니는 이 땅의 색을 보고 레이블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가 평소 좋아하는 이미지는 ‘단순하면서도 총괄적인’ 것이었다. 그는 와인의 근원인 ‘토양(흙)’을 표현하기로 했고 그 이미지를 위해 붉은 점 하나를 찍었다. 필자는 처음 이 레이블을 봤을 때 사자성어 ‘화룡점정’이 떠올랐다. 친치니에게 그 의미를 알려 주자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갈 덮인 포도밭
2 핑카 발피에드라 Finca Valpiedra
와인 레이블에 왜 돌이 등장한 걸까. 갈라지고 반들반들해진 표면을 보니 이 돌은 아주 오랜 세월 강물에서 뒹굴었던 것 같다. 분명 이 돌은 포도밭에서 발견됐을 테고, 그렇다면 그 포도밭은 이런 자갈로 뒤덮여 있을 거란 예상을 할 수 있다. 자갈 포도밭에서 생산된 와인. 생산자는 이 돌의 이미지를 빌려 자신이 만든 와인의 어떤 부분을 설명하려 한 걸까. 와인과 돌에는 분명 관계가 있다. 돌은 기본적으로 견고한 이미지를 갖고 있고, 동시에 오랜 세월의 흔적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돌과 와인의 관계에는 ‘따뜻함’이 더 큰 이미지로 작용한다. 돌은 낮 동안 햇볕의 온도를 가뒀다가 찬 밤이 되면 포도나무 주변의 온도를 높여 줌으로써 포도의 생육을 돕는다. 스페인의 리오하 지역에는 와인 명가가 많다. 이곳의 축적된 양조 기술과 최고의 포도로 아주 오랫동안 숙성할 수 있는 와인들을 생산하고 있다. 이들 중 하나가 핑카 발피에드라이고 이 와인이 만들어진 포도밭 환경을 레이블 속 조약돌 하나가 설명하고 있다. 돌 속에서 열리는 포도, 이것으로 만든 와인 속에는 분명 돌의 소망도 존재하지 않을까. 마시면 따뜻해지고, 그것을 함께 마신 사람들의 관계는 견고해지기를 바라는 그런 바람 말이다.
추상화로 그린 포도
3 에나테 Enate
와인 레이블과 화가가 만나면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까. 여기 유명 화가의 눈을 통해 그려진 포도송이가 있다. 단순하지만 마치 한 폭의 추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와이너리의 이름을 알려 주는 글자 에나테(Enate) 역시 포도송이의 한 부분 같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스페인의 빅토르 미라(Victor Mira·1949~2003년)다. 스페인의 사라고사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생을 마감한 세계적인 화가이면서 작가다. 에나테 와이너리는 자신들의 모든 와인 레이블을 유명 화가에게 부탁해 왔다. 그중에는 안토니 타피에스 같은 현대 거장 화가의 작품도 포함돼 있다. 에나테가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디자인에 사용하는 이유는 양조장에 현대 미술품을 소장한 갤러리를 갖고 있으며 이를 통해 수많은 젊은 현대 화가를 지원·교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와인과 예술의 만남’은 한 병의 와인을 마시는 동안 화가의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행복을 선사한다. 이 레이블을 가진 와인 에나테 크리안자는 스페인의 주 포도 품종인 템플라니오 70%와 카베르네 소비뇽 30%를 섞어 만든 중간 정도 보디의 와인이다. 부드러우면서도 스페인 와인 특유의 균형감이 좋아 앞으로 10년 정도 숙성이 가능한 와인이다. 물론 예술성 있는 레이블은 영원하겠지만.
‘어우러짐’의 행운
4 온다 도로 onda D’Oro
금파, 즉 ‘황금의 파도’란 뜻이다. 동양에서 금은 ‘정화’의 의미를 갖고 있다. 황금으로 이뤄진 원과 그 주변을 흐르고 있는 물결에서 동양 철학이 강하게 느껴진다. 더 나아가서는 불교적인 색채도 느껴진다. 와인 제작자는 레이블에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싶었던 것 같다. 온다 도로 와인의 첫 빈티지는 2005년이다. 올해 2006년산이 출시됐고, 2007년산은 현재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양조장에서 숙성되고 있다. 와인의 이름 ‘온다 도로’는 이탈리아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레이블 디자인은 밀라노에 작업실을 둔 디자이너 산나 윌리엄이 맡았다. 그는 반피(Banfi) 같은 유명 와인의 레이블을 제작한 바 있다. 와인은 미국에서, 레이블은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다. 와이너리 오너는 한국인이고 와인 메이커는 프랑스인이다. 4개국의 정서가 와인에 고스란히 반영됐기에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행운을 나누며 함께 공존하기를 원했던 게 오너의 철학이다. ‘온다 도로’를 거꾸로 읽으면 ‘도로 온다’다. 쉽게 기억할 수 있는 한국말이다. 황혼에 물드는 바다를 보면 진한 황금빛 물결로 일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온다 도로 와인 속에는 세계를 향해 활짝 열린 바다의 황금 정서가 녹아 있는 것 같다.
붉은빛 흙과 와인
5 브리코 델 우첼로네 Bricco dell’Uccellone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역에는 자신의 마을이 ‘세계의 배꼽’에 해당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사는 마을의 언덕에 서면 테이블 와인(서민적 저가 와인)만을 만들던 바르베라 품종의 포도밭을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와인 명품 대열에서 영원히 묻혀 버릴 수 있었던 바르베라를 이탈리아 명품 와인 대열에 올려놓은 와이너리가 바로 브라이다(Braida)고 여기서 생산하는 와인이 바로 브리코 델 우첼로네다. 지난 30년 동안 이탈리아 와인 ‘베스트 10’을 꼽는 데 빠지지 않고 포함됐던 와인이다. ‘언덕 위의 큰 새’를 의미하는 이름은 포도밭이 조성된 언덕을 검은 옷을 입은 노파가 늘 걸어 다녔고, 그 할머니의 매부리코가 새를 닮아 이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글자 모양과 크기를 적절히 배합한 레이블 디자인은 단순하지만 선명한 기억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이보리 바탕 위에 토양과 와인색을 잘 반영한 붉은 컬러를 사용한 점도 고급스럽다. 실제로 이 와인이 숙성되면 레이블에 사용된 붉은빛을 갖게 된다. 바르베라 품종은 맑고 깔끔하게 정선된 맛과 개성을 갖고 있다. 와인의 본질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레이블 제작은 스튜디오 그라피코 아르티지아노에서 이뤄졌다.
“색깔을 보여주세요”
6 카네토 Canneto
레이블 위의 하얗고 작은 네모는 실은 구멍이 뚫려 있다. 이 작은 ‘창문’은 레이블 디자이너의 호기심에서 착안됐다. “와인 병 속이 너무도 궁금했습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 남쪽 몬테풀치아노 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카네토 와이너리는 예부터 ‘모든 와인의 왕’으로 대접받아 온 귀족 와인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Vino Nobile di Montepulciano)’를 생산해 왔다. 안타깝게도 와이너리의 현 소유주는 스위스 사람들이다. 카네토 와인을 너무도 사랑해 매년 즐겨 마시던 스위스 사람이 주변 친구들과 함께 경영이 어려워진 와이너리를 사들인 것. 그러나 와인을 만드는 사람은 여전히 마을의 토박이다. 카네토의 레이블에는 모두 작은 창문이 있다. 와인의 종류에 따라 레이블 색이 다른데 가장 진한 색이 3년 이상 숙성시켜 만든 리제르바(Riserva) 급 와인이다. 카네토의 포도밭은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는 몬테풀치아노 마을을 바라보며 서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화산재와 모래, 자갈이 골고루 섞여 있는 토양의 특성이 반영된 와인은 풍성하고 독특한 향과 맛을 전달한다. 전체적으로 중간 정도의 힘을 갖고 있지만 리제르바 급의 경우는 20년 정도는 충분히 숙성할 수 있다.
두 가문의 멋진 만남
7 오퍼스 원 Opus one
와인 구대륙을 대표하는 프랑스와 신대륙 미국의 만남, 위대한 두 와인 가문의 만남. ‘오퍼스 원’은 지난해 세상을 떠난 로버트 몬다비와 프랑스 보르도의 가장 화려한 와인 무통 로칠드의 세계적인 합작품이다. 합작 후 레이블을 어떻게 제작할 것인지가 두 가문에는 큰 숙제였을 것이다. 몬다비의 자서전에도 언급했듯 디자인 논의를 위해 수없이 많은 국제 통화와 만남이 이뤄졌다. 마침내 두 가문은 샌프란시스코에 작업실을 갖고 있는 디자이너 수전 페트를 레이블 제작자로 선정했다. 페트는 네 개의 견본을 만들어 미국과 프랑스를 들락거리며 디자인을 완성시켰다. 2개의 두상 실루엣은 몬다비와 필리핀 로칠드 남작이다. 두 가문은 남작의 실루엣을 좀 더 위에 놓음으로써 연장자이면서 업계의 대부인 그에게 예우를 갖췄다. 그리고 아래쪽 서명 부분에는 몬다비를 위쪽에 놓아 서로 아쉬움이 없게 했다. 푸른색을 사용한 레이블은 두 가문의 멋진 파트너십만큼이나 선명하고 간결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오퍼스 원은 출시되자마자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지역 최고의 와인 대열에 진입했고 지금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보르도 스타일의 섬세함과 나파밸리의 농밀함이 균형을 잘 이룬 오퍼스 원은 말하자면 선남선녀가 만나 얻은 귀한 자식이다.
‘그 옛날’의 영광을
8 파소피시아로 Passopisciaro
이 레이블에서는 어쩐지 ‘시간의 향기’가 느껴진다. 선명한 현재와 흐트러진 과거의 향수 같은…. 2006이라고 쓰인 숫자는 와인의 빈티지다. 그 아래 새겨진 ‘파소피시아로’는 길(파소)과 물고기(피시오)의 복합어다. 의미를 설명하면 해발 1000m 이상에 위치한 와이너리와 주변 포도밭 사이로 난 작은 길들은 ‘생선 장수들이 지나던 길’이었다. 높은 해발에서 성장한 포도로 만든 파소피시아로 와인은 더운 지방에서 생산되는 와인 특유의 농밀한 맛보다는 산미가 유별나게 느껴진다. 와인을 만든 사람은 안드레아 프랑게티. 그는 카베르네 프랑 품종으로 좋은 와인을 만들어 비평가들에게서 ‘토스카나의 슈발 블랑(프랑스 생테밀리옹 지역의 최고급 와인)’이란 찬사를 받은 인물이다. 레이블은 지역 역사를 반영하자는 프랑게티의 생각을 기초로 패션디자이너가 작업했다. 바탕이 된 것은 파소피시아로 포도원 매입 당시 발견된 고문서다. 디자이너는 그 위에 현대적 감각을 더했다. 프랑게티의 친척 중에는 유명 예술가가 있고, 본인의 가문은 유명 주류 회사의 소유주다. 이 두 가지 요소들이 어울려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레이블이 만들어진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길과 생선 장수 또는 생선을 이용해 도안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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