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마시면 가장 먼저 접하는 지명이 있다.
바로 보르도다.
프랑스 보르도가 왜 와인 산지로 유명할까.
특히 한 병에 수백만원씩 하는 특급 와인들이 즐비하다.
프랑스 와인 사업이 위기라지만
보르도의 특급와인들에겐 딴 세상 이야기다.
보르도가 각광받는 이유는 타고난 재배 환경도 있겠지만 빼놓을 수 없는게
까다로운 등급 체계를 일찍부터 구축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프랑스인들의 멀리 보는 안목인지, 아니면 타고난 상술이었는지 애매하다.
프랑스인들만큼 점수 매기고 등급 나누기 좋아하는 민족도 없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을 평가하는 미쉘린이 별 3개를 주던 파리의 한 오리전문 레스토랑에
"변화가 없다"며 별 2개에 흰별 하나로 강등시키자 그 레스토랑 요리사가 자살했다.
이게 프랑스 사람들이다.
나폴레옹 3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앞두고
보르도의 메독 지방 와인의 우수성을 알리라며 등급을 나눠라고 지시했다.
지시를 받고 한참을 고민하던 보르도 와인상공회의소는
당시 거래가를 기준으로 보르도 메독 지방의 수많은 와인의 등급을 일괄적으로 매겨버렸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와인들은 그랑 크뤼라고 해서 61개를 뽑았다.
그랑크뤼급은 다시 5개 등급으로 나눠졌다.
와인 오너들의 반발도 많았을 터.
당시 2급을 받은 샤토 그뤼오 라로즈의 오너는
이에 열받은 나머지 회의장에서 소리를 지르며 나가버렸다고한다.
"니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는 최고의 와인"이라며.
이 와인은 노무현 대통령이 영국 방문했을 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대접한 와인이다.
하지만 철저하게 등급제를 시행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브랜드 파워가 형성되고, 그에 대한 신뢰가 따랐다.
프랑스인 특징이 한번 매긴 제도나 등급은 철저하게 믿고 따른다는 점이다.
아무튼 이 등급제가 보르도 와인 전체의 품질도 상향 평준화로 치닫게 된 것 같다.
이탈리아는 나중에서야 이 등급제를 따라하게 된다.
근데 이탈리아인들은 너무 창의적인 탓인지
이 등급제에 반발하는 와인 오너들이 너무 많아 제대로 유지가 안된다 --;
아무튼 우리가 이제서야 이천쌀이니, 한섬모시니 하고 벌이는 마케팅을
프랑스 촌동네의 보르도에선 150년 전에 벌이고 있었던 셈이다.
보르도의 61개 그랑크루 와인 중에서도 5개의 1급 와인이 있다.
샤토 마고, 샤토 라투르, 샤토 오브리옹, 샤토 무통 로쉴드, 샤토 라피트 로쉴드.
이 중에선 샤토 라투르를 빼고는 모두 방문해봤다.
샤토 라투르는 프랑스 입국 3일을 남겨 놓고 급하게 예약을 시도했는데 역시 '다음 기회'였다.
라투르는 한국에선 김정일이 좋아하는 와인으로 유명하다.
평양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에서 그는 이 와인을 꺼냈다.
와인 역시 사치품으로 북한입국이 금지된 품목이 됐으니 얼마나 애가 탈지 짐작이 간다.
내가 맛본 5개 특급 와인 중에서 가장 강렬한 맛으로, 내겐 가장 매력적인 와인이었다.
이들 5가지 와인은 특급 중의 특급인만큼 전설적인 히스토리들이 숨어있다.
숨어 있다기 보다는 보기 좋게 포장했다는 게 더 진실일지 모른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언급 되는 와인은 샤토 무통 로쉴드다.
무통 로쉴드는 사실 1973년에 2급에서 1급으로 승격됐다.
보르도 고유의 등급체계를 깨트린 거의 유일무이한 샤토다.
1855년 등급제가 시행되자마자 한 샤토의 등급이 변경됐지만 실시된 지 얼마 안되서였다.
1973년 당시 농림부 장관이었던 시라크 대통령이 무통의 치밀한 전략과 로비에 결국 두 손을 들어 버린 것이다.
이 때 무통 주인인 필립 남작은 다음과 같은 세기의 명언을 남겼다. 좀 가증스럽다 --;
"Second I was, First I am, but I, Mouton do not change"
무통의 1급 승격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대표주자가 라피트 로쉴드였다.
무통 주인과 라피트 주인은 로스차일드(로쉴드) 가문으로 사촌지간이었지만 그만큼 경쟁심도 높았다.
무통은 마케팅 솜씨 역시 보통이 아니다.
특히 피카소, 앤디 워홀 등 세계적인 화가들이 직접 그린 와인 라벨로 유명하다.
이번에 출시되는 2004년산 무통 로쉴드 라벨은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그렸다.
찰스 황태자는 수채화를 잘 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번에 가서 무통 사장에게 물어봤더니 라벨 그린 사람은 돈 대신 와인을 받는다고 한다.
자신이 그린 해에 만든 와인 한 박스와 나머지 한 박스는 자신이 정할 수 있다.
와인 애호가라면 이런 제안이 얼마나 황홀한지 짐작이 갈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도 무통의 라벨을 그리는 사람이 꼭 나왔으면 좋겠다.
무통은 이렇듯 마케팅도 별로 하지 않고 점잖 빼는 특급 와인세계에서 이단이다.
그런데 이 무통 말고 이단아가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샤토 오브리옹이다.
61개의 그랑크뤼 와인 중에서 이 오브리옹만 메독이 아닌 그라브에 있다.
메독이 보르도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반면 오브리옹이 위치한 그라브는 보르도 남쪽에 있다.
보르도 시내에서 차를 타고 20분만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로 시내와도 가장 가깝다.
오브리옹은 이렇듯 지리적인 예외도 인정될만큼 품질이 뛰어난 샤토다.
보르도 지역의 최초 샤토에다,
특히 미국 대통령을 지낸 토마스 제퍼슨이 프랑스 대사 시절 가장 좋아했다.
당시 제퍼슨은 와인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등급제를 실시하기 전 이미 '자신의 등급제'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
나중에 보르도상공회의소가 이 제퍼슨 리스트를 참고한 것은 물론이다.
오브리오은 이렇게 와인 말고도 맛볼만한 에피소드들이 많이 숨어 있는 샤토다.
막상 오브리옹을 가보니 너무 더웠다. 그야말로 찜통 같았다.
프랑스 서해의 바닷 바람이 보르도 시내를 거치며 열기가 더해져서인지 메독지방의 포도밭보다 평균 3~4도 높다.
35도가 넘나드는 포도밭에 나가 땅을 보니 자갈이 많았다.
그라브가 자갈이라는 뜻을 지녔다더니 역시나.
자갈 하나를 집었더니 찜질방 옥돌처럼 후끈거린다.
보르도의 특급포도밭의 요건엔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내가 본 바로는 경사진 땅, 자갈, 그리고 물을 갖춰야 된다.
자갈은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받아서 서늘한 밤에 내뿜으며
포도밭 열기를 적당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여러 특급 샤토를 둘러본 후 막상 귀국하니까
이 오브리옹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
뜨겁게 작렬하던 햇살 속의 포도밭과 상대적으로 서늘했던 와인셀러.
그리고 투어 마지막에 한모금 맛봤던 오브리옹은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향수로 남아 있다.
샤토 마고가 누구나 좋아하는 와인이라면,
샤토 무통 로쉴드가 언제나 매력적인 와인이라면.
샤토 라피트 로쉴드가 어디서나 완벽한 와인이라면
샤토 라투르가 남자들이 꿈꾸는 와인이라면
샤토 오브리옹은 삶의 깊이를 가진 촌부 같은 와인이다.
갑자기 89년산 오브리옹이 마시고 싶다.
/ 손용석의 와인이야기
<오브리옹 포도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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