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틈, 낙엽 사이… 야생 봄꽃은 저만의 봄을 피우고 있다
지금 남쪽 섬진강 일대는 야단이 나 있다. 어느 해보다 맹추위가 기승을 부린 겨울을 견뎌낸 풀과 나무들이 일제히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번식 본능은 맹렬한 속도로 북상 중이다.
지난달 30일 찾은 전남 광양 매화마을은 흰색 물감을, 구례 산수유마을은 노란 물감을 뿌려놓은 듯했다. 매화 꽃잎이 흩날리고 산수유 색이 조금씩 바래가고 있는 것과는 달리, 벚꽃은 절정이었다. 특히 섬진강 벚꽃길은 흰 뱀이 꿈틀대는 듯 흰색 물결로 뒤덮여 있었다. 이곳을 지나는 여인들은 꽃향기에 취한 듯 볼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한 20대 아가씨는 "벚꽃이 솜털처럼 뽀송뽀송한 것이 꼭 엠보싱 같다"고 했다. 땅바닥에서 보랏빛이 나는 듯해 다가가 보면 현호색이 피었고, 도로가에서는 조팝나무가 뒤질세라 앙증맞은 꽃망울들을 다닥다닥 터트리고 있었다. 땅과 가지 끝을 잘 살피면 막 피어나는 꽃을 발견할 수 있듯이 주의 깊게 읽어보면 우리 소설 속에도 수많은 꽃이 피어 있다. 이 봄, 나들이에 동행하면 좋을 소설과 소설 속 꽃들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을 소개한다.
◇꽃에 취해 사랑에 취해
윤대녕의 중편 '3월의 전설'의 배경 계절은 바로 지금이다. 구례 산수유마을 산수유와 화개 벚꽃, 섬진강 매화가 필 때를 배경으로, 화려하게 펼쳐지는 봄꽃들을 감상할 수 있는 이 소설은 꽃으로 시작해 꽃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일폭포에 다녀올 작정으로 쌍계사로 들어가니… 매화, 산수유가 팔영루 까만 기와지붕 끝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며 희고 노랗게 치솟아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집집마다가 산수유요 골목과 밭들과 산자락 모두가 산수유여서 현기증을 보듯 눈앞이 어지러웠다.'
이 소설에는 꽃에 취해 일탈하는 비구니와 유부녀가 나온다. 비구니는 산수유가 '참 부산스럽게 핀' 어느 봄날 산수유마을을 지나다 서울 신사에게 손목이 잡혀 환속(還俗)하고, 유부녀 난희는 화개에서 5㎞ 벚꽃길을 걸어와 "꽃들을 함부로 훔쳐보며 오는 게 아닌데…"라며 주인공에게 덤빈다. 그러나 관계가 끝나자마자 "짚 썩은 물을 받아 마시고 싶어요(정화작용의 의미)"라고 말한다.
사실 이번 남도 여행은 아내가 '3월의 전설'을 읽고 꼭 가보고 싶다고 해서 내려간 것이었다. 그런데 '3월의 전설' 내용을 잘 아는 입장에서 벚꽃이 만개했을 때 아내 혼자 가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아내는 "짚 썩은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할까 봐 따라오느냐"고 나를 놀렸다.
김유정의 단편 '동백꽃'에는 '노란 동백꽃'이 나온다.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노란 동백꽃은 생강나무를 가리키는 것이다.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나무라고 부른다. 요즘 산에 가보면 노란 생강나무꽃을 흔히 볼 수 있다.
김유정의 고향이자 '동백꽃'의 배경 마을인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는 김유정문학촌이 있다. 이곳 마당과 주변은 물론, 경춘선 '김유정역'에서 문학촌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도 생강나무를 잔뜩 심어 놓았다. 지금쯤 그곳에도 '노란 동백꽃'이 한창 피어 있을 것이다. '동백꽃'을 막 읽은 둘째딸은 문학촌 생강나무를 보더니 "여기로 넘어졌으면 아팠겠다"고 했다.
◇천마산·화야산·축령산 야생 봄꽃 천지
김훈의 장편소설 '내 젊은 날의 숲' 주인공은 수목원에서 식물을 그리는 세밀화가라 꽃이 많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봄꽃의 선봉대인 얼레지가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꽃은 식물의 성기라는데, 눈을 뚫고 올라온 얼레지꽃은 진분홍빛 꽃잎을 뒤로 활짝 젖히고 암술이 늘어진 성기의 안쪽을 당돌하게도 열어 보였다.'
얼레지는 이른 봄에 꽃대가 올라오면서 자주색 꽃 1개가 밑으로 숙이며 피는데, 꽃잎은 뒤로 확 젖혀져 있다. 얼레지라는 이름은 녹색 이파리 여기저기에 자줏빛 얼룩이 있어서 붙은 것이다.
얼레지는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꽃이다. 이름도 특이한 데다 꽃 생김새도 파격적이기 때문이다. 얼레지를 원 없이 본 것은 3월 말 경기도 가평 화야산에서였다. 화야산은 전국에서 얼레지가 가장 큰 군락을 이룬 곳이다. 3월 말~4월 초 서울 주변 천마산·화야산·축령산 등에 가면 복수초·노루귀·얼레지·너도바람꽃·괭이눈 등 이른 야생 봄꽃들을 볼 수 있다.
권여선의 소설집 '처녀치마'에는 처녀치마라는 특이한 꽃이 나온다. 이혼남을 사귀는 서른다섯 살 노처녀 여주인공의 복잡한 감정, 이제 자신이 '그에게 아무 자극도 영감도 줄 수 없는 존재'라는 절망감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남자친구가 다시 '나의 표정 하나, 말 한마디에 몸이 달아 발을 구르기를', 자신이 그에게서 '기적처럼 연두빛 실타래 같은 처녀치마의 잎사귀'로 피어나기를 갈망하고 있다.
아직 바람 쌀쌀한 초봄에 낙엽이 쌓인 산을 지나다 처녀치마를 발견하면 신비로운 빛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몇해 전 4월 중순 북한산에서 낙엽이 수북이 쌓인 틈으로 연보라색 처녀치마를 발견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야생화 책에서 본 사진과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깜짝 놀랐다.
◇아파트 화단에서도 만나는 씀바귀
김주영의 자전적 성장소설 '홍어'에는 씀바귀가 등장한다. 어느 폭설이 내린 날, 주인공 소년 집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렁뱅이 처녀 삼례는 '눈 속을 헤집고 씀바귀 뿌리를 찾아내는' 재주가 있다. 삼례는 어느 날 부엌 문설주에 '파릇파릇한 기운을 아직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씀바귀를 걸어두고 갑작스럽게 떠나버린다. 그 자리는 평소 어머니가 홍어를 걸어둔 곳이었다.
이윽고 아버지가 6년 만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다소곳이 절을 올리지만, 다음 날 새로운 인생을 찾아 가출하는 반전이 있다. 홍어가 가부장적 질서를 상징한다면, 씀바귀는 이에 대한 거부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 꽃을 보기 위해 소설의 무대인 경북 북부지방을 갈 필요는 없다. 씀바귀는 아파트 화단, 공터 같은 도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이달 말부터는 연두색 잎에서 올라온 꽃대에 앙증맞은 노란 꽃들을 피우는 씀바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순태의 중편 '철쭉제'는 80년대 지리산 철쭉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6·25때 세석평전에 묻힌 아버지 유골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아버지 사망에 얽힌 비밀을 알고 가해자와 화해하는 내용인데, 철쭉에 대한 묘사가 화려하다. '온통 산에 붉은 물을 뿌려 놓은 것 같은, 세석평전의 철쭉꽃밭이 질펀하게 펼쳐져 있었다.…세석평전 삼십여 리를 덮어버린 것 같은 꽃밭은 불난 것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요즘은 생태 보호를 위해 세석평전 철쭉제는 열리지 않고, 대신 지리산 바래봉 철쭉제가 열리고 있다. 세석평전과 바래봉 철쭉은 종류가 다르다. 세석평전 철쭉은 연분홍 '철쭉'이지만, 바래봉 철쭉은 진분홍 '산철쭉'이다.
허리를 굽히세요, 아름다운 자태 보고 싶으면 (0) | 2014.03.10 |
---|---|
봄바람 따라 떠나는 남녘 봄마중 '구례-거제' (0) | 2014.03.10 |
산수유꽃 피는 남도의 산야 … 바로 여기가 봄이더라 (0) | 2014.03.05 |
'쌀밥나무' 이팝나무 (0) | 2014.03.05 |
매화는 추위를 견뎌 맑은 향기를 흘린다 (0) | 2014.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