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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숨과 날숨, 행복한 삶의 비밀!

라이프(life)/명리학

by 굴재사람 2011. 4. 15.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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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숨과 날숨, 행복한 삶의 비밀!  

 

숨을 쉬지 못하면 죽게 된다. 물론 살아있는 모든 이는 숨을 쉬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숨도 잘 쉬어야 잘 살 수 있다는 것은 잘 모르고 산다. 숨이란 날숨과 들숨이고 줄여서 호흡(呼吸)이라 하는데 이 속에 행복한 삶의 비밀이 담겨져 있다. 이는 바로 이완(弛緩)과 수축(收縮)이며 나아가서 음양(陰陽)의 조화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놀라게 되면 절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게 되고 그로서 온몸의 근육과 뼈에 힘을 축적하게 된다. 이는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에 대비하는 생리적인 긴장 반응이다. 그렇지만 긴장 상태가 오래가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므로 평상시에 우리는 이완과 수축을 되풀이하는 자연스런 리듬을 갖는다.

 

그런데 지난 20세기부터 그런 리듬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스피드 중독증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면 속도와 높이, 힘에 대한 선망 증후군에 빠져든 것이다. 뭐든지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강하게, 이런 것들이 가치이자 덕목이 되어버린 것이다.

 

빠른 자동차, 높이 나는 비행기, 더 강한 엔진, 이런 것들과 함께 원래는 그저 인간의 체력과 덕성 함양을 주장하던 올림픽 경기들도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었다. 거기다가 최근 수십 년간은 반도체 집적 소자의 밀도가 4년마다 두 배씩 증가한다는 것이 널리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제는 강하고 빠르며 더 높은 것에 대한 열망이 아예 현대인의 체질 속에 용해되어 생활의 기본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히 지난 20세기는 변화와 속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물론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너무 오랫동안 없으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다 풀어져서 근육과 뼈마디에 힘이 빠지고 정신도 나태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의 권태나 나태는 자극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극 과잉의 결과로 웬만한 자극은 자극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물을 넓고 보다 긴 호흡에서 바라보는 유장(悠長)한 사고는 실종되어 버리고, 순간의 집중적인 자극만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우리의 의식이 변해버린 것이다. 이런 변화는 당연히 우리의 호흡도 가쁘게 몰아쉬도록 만들고 있다.

 

몸속에 기가 충만한 사람은 호흡도 유연하고 길다. 특히 내쉬는 숨의 길이가 급하지 않고 오래간다. 등산을 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산을 많이 오르내린 사람은 산길을 갈 때 숨이 급하지 않지만, 모처럼 산을 오르는 사람은 금방 가쁜 숨을 몰아쉬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체력이 약하면 조금만 힘을 써도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이에 따라 호흡의 사이클도 짧아지기 마련인 것이다. 심하면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그만 주저앉아 버린다.

 

물론 심폐 운동을 자주 그리고 꾸준하게 하는 것이 해답이지만, 그에 앞서 우리의 정신부터 긴 호흡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언제나 긴장과 수축 상태에 있는 사람보다 평상시에 이완과 수축을 리드미컬하게 지니고 있는 사람이 힘을 쓰고 집중할 때는 더욱 강하고 부드러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법이다. 여기서 부드럽다는 것은 힘의 사용이 원만 자재하여 거칠 지가 않다는 말이다. 사실 이 말은 무술인들이 늘 염두에 달고 다니는 관념이며 목표이기도 하다.

 

강하게 더욱 강하게만 밀고 나가면 얼마 안 가서 더 강해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지만, 강약을 배합하면 그리 강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강할 수 있는 것이다. 음악에서 급하게 강한 박자로 나가다가도 어느 순간 더 없이 조용하고 느긋하며 느린 음조로 바뀌는 것도 강약의 배합이다. 마땅히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강한 힘을 속에 숨기고 있으면서도 힘의 운용을 연하게 할 때 우리는 절제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여지가 남아있는 강함이 더욱 강한 것이다.

 

호흡, 즉 날숨과 들숨을 고르게 하고 더욱 길게 가져가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과 정신부터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구태여 기공이나 명상을 익히지 않아도 좋다, 숨 길이를 고르고 길게 가져가려는 마음가짐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날숨과 들숨, 이는 이완과 수축의 기본이며 바로 음양이다. 수천가지의 기공이나 토납법이 그 기본은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문명이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 지방에서 현저한 발전을 보인 것도 따지고 보면 기후의 변화에 따라 저절로 이완과 수축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계절이 변할 수 있는 기본 이치는 지구가 자전축에서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음양오행을 장기간 동안 연구해 왔지만, 그 자체가 전 우주에 적용되는 변화의 기본원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 상태에서 그것은 검증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다만, 음양은 해의 길어짐과 짧아짐, 그를 통한 계절과 기후의 변화, 지구 자전에 따른 낮과 밤의 변화가 음양오행의 기본 이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겨울에도 춥지 않은 난방 시설을 가졌고, 여름에도 덥지 않은 냉방 시설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수축과 이완의 폭을 좁힌 것이다. 거기에 너무나 많은 자극들이 수축 상태를 가져왔고, 거기에 속도와 높이, 강도에 대한 선망증이 우리를 한없는 긴장 일변도로 몰아가고 있다.

 

필요할 때 빠르고 강하고 더 높아지기 위해서는 평상시 느리고 연하고 낮은 곳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근 느리게 살자는 사조가 등장하고 있다. 느긋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일러 ‘슬로비(Slobbie) 족'이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슬로비족은 천천히 그러나 더 훌륭한 삶을 기치로 내걸고 명상이나 요가, 시골 취향과 가족 중심의 편안하고 느긋한 생활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피에르 상소라는 사람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란 책을 내면서 힘을 받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느림의 철학은 민첩성이 결여된 정신이나 둔감한 기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다 중요하며, 어떤 행동이든 단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급하게 해치워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한다.

 

이 사람이 권하는 느림 실천법은 이런 것들이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발걸음이 닿는 대로 한가로이 거닐기, 사람의 말을 끝까지 집중해서 들어주기, 반복적이고 사소한 일들을 오히려 소중하게 받아들이기, 우리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거나 자유롭고 무한히 넓은 미래의 지평선을 향해 마음을 열어보기, 우리 안에서 조금씩 진실이 자라날 수 있도록 마음의 소리를 옮겨보기, 지혜를 가르치는 순수한 액체인 포도주에 빠져보기 등이다.

 

또 슬로 푸드 운동이라는 것도 있다. 패스트푸드의 반대말이다. 그 기본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것이고, 나아가서 음식을 기다리면서 여유를 되찾자는 것이다.

 

이 모두 현대 사회가 수축만 강요할 뿐, 이완을 잊어버렸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몇 년 전 ‘시(時)테크’라는 말이 나왔을 때, 필자는 세상에서 가장 유해한 사조가 등장했구나 싶었다. 월급이 얼마이므로 이를 시간당 나누면 얼마이고, 초당 얼마가 되니 일초라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얼마나 지독한 강박증인가!

 

이는 인체의 리듬이란 것, 나아가서 만물의 리듬과 주기라는 완전 무시라고 도외시한 비인간적 발상이다. 이는 생산성 신화와도 같은 맥락이다. 생산성이란 기업이 만들어내는 물건이 팔린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사조이다. 그 밑바탕에는 ‘그래 제품은 기업주인 내가 유능한 마케터들을 고용해서 팔아치울 수 있으니 너희들 컨베이어 벨트에 부착된 일 벌레들은 촌음을 아껴서 열심히 제품이나 만들면 되는 거야’ 하는 비인간적인 발상이 깔려있다.

 

일이란 그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창의성이 더 중요한 것인데, 이는 단순하게 소요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 것이다.

 

여유롭고 부드럽게, 그리고 충분히 이완될 수 있어야만 수축할 때 제대로 수축하고 목표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사랑을 나누던가 아니면 잠과 휴식을 통해 풀어주는 것이 삶이다. 이것이 이완과 수축이고, 음양이며, 그 기본은 날숨과 들숨을 고르고 길게 가져가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주를 본다는 것 역시 그 사람의 여덟 글자가 어떤 식으로 이완과 수축을 되풀이하면서 기의 흐름이 원활하게 유통되는 가를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의 유통이 부드러우면서도 쉼이 없으며 끊임없이 면면하게 이어지면 바로 그것이 좋은 사주인 것이다.

 

아프면 쉬어야 한다는 것, 때로는 게을러야 집중할 때 집중의 강도가 나온다는 것을 얘기해 보았다.


[출처]<a href='http://www.hohodang.com/?bbs/view.php?id=myungli&no=106' target='_blank'>호호당 블로그</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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