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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 난

글모음(writings)/꽃과 나무

by 굴재사람 2010. 12. 29.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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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축하 난

 

 

임오군란이 실패하고 운현궁에 유폐된 흥선대원군. 유일한 소일이 묵란(墨蘭)이다. 화선지에 난초를 치는 거다. 좌절과 울분 때문일까. 그의 난초는 연검(軟劍)처럼 서늘하고 예리하다. 초기 힘차고 날카로웠던 잎줄기는 그러나 차차 가늘고 부드러워진다. 체념한 듯, 달관한 듯 바람에도 눕는다.

 난초의 꽃말은 청초한 아름다움이다. 소동파는 ‘춘란은 미인과 같아서 꺾지 않아도 향기를 선사한다’고 했다. 어디 향기뿐이랴. ‘한 송이 난초 꽃이 새로 필 때마다/돌들은 모두 금강석 빛 눈을 뜨고/그 눈들은 다시 날개 돋친 흰 나비떼가 되어/은하로 은하로 날아오른다’(서정주 ‘밤에 핀 난초 꽃’)고 했다.

 이를 공자도 알아봤다. 주역의 계사(繫辭)에서 ‘둘이 한마음이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자르고, 한마음으로 말하면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고 했다. 은근하면서도 굳은 우정을 의미하는 금란지교(金蘭之交)의 유래다. 공자가어(孔子家語)도 ‘깊은 산 속 난초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향기롭다’며 선비의 지절(志節)을 논한다. 일정한 생업이나 넉넉한 재산이 없어도 꿋꿋한 항심(恒心)이 있으면 바로 군자(君子)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군자(四君子) 가운데 으뜸이요, 은군자(隱君子)로 뭇 시인묵객으로부터 굄을 받았다. 하나의 꽃대에 하나의 꽃, 일경일화(一莖一花)는 남산골 딸깍발이의 정신이다. 가람 이병기도 시 ‘난초’ 연작에서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 하여/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고 칭송했다.

 난은 계절도 가리지 않는다. 봄에는 춘란(春蘭)이요, 여름엔 건란(建蘭)이다. 가을엔 소심(素心)이고, 겨울엔 한란(寒蘭)이다. 지역도 안 가린다. 바람 많은 제주에는 풍란(風蘭), 흑산도에는 흑란(黑蘭), 울릉도에는 울란(鬱蘭)이다.

 기업마다 관공서마다 난초가 성시다. 인사철을 맞아 축하 난이 쌓인다. 보내는 쪽이나 받는 쪽에 크기도 적당하고, 모양새도 좋다. 연말연시가 대목인 꽃집도 좋다. 운반하기도 편한데, 사무실 난초는 1년을 못 버틴다. ‘물주기 3년’이라 했다. 야생의 성질을 사무실에서 다스리기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축하 난의 덕목은 은근한 가르침에 있을 것이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추운 세상에 ‘소심(素心)’으로 ‘보춘(報春)’하라는 것 아니겠나. 난향천리(蘭香千里)다. 인덕만리(人德萬里)와 연정구만리(戀情九萬里)에 비길 수 없지만.

박종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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