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 화가 박대성
박대성은 신라 왕릉과 천년 솔숲을 뒷마당으로 거느리고 산다. 나직한 집 돌담 너머 키 큰 도래솔들이 푸름으로 경애왕릉을 에워쌌다. 포석정에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친 왕의 영혼을 하늘로 보내려고 옛 사람들이 무덤가에 심은 소나무들이다.
집 뒤 오솔길 따라 송림을 더 들어가면 왕을 셋 모신 삼릉이 있다. 사진작가 배병우가 찍어 세계를 매료시킨 소나무숲이 신비롭도록 아름다운 곳이다. 용 비늘 같은 나무 등껍질들이 아침 안개에 잠겨 있다. 박대성은 아침마다 집을 나서 경애왕릉부터 삼릉, 포석정까지 천천히 걷는다. 걸으면서 경주가 들려주는 신화에 귀 기울인다.
박대성은 스스로를 능(陵)지기라고 했다. 이렇게 복 받은 능지기도 있을까. 왕복 5㎞쯤 되는 산책길은 그가 이미지를 길어 올리는 보고(寶庫)다. 그의 작품 열에 일곱이 경주를 담는다.
그는 작업실 통유리로 내다보이는 뜰도 정성껏 가꾼다. 자갈 깔아 맨발로 오간다. 자그마한 연못은 연꽃과 어리연꽃을 내밀었고 못가엔 빨간 석류꽃이 한창이다. 대밭 사이로 갖가지 석상(石像)과 괴석도 세워놓았다. 아담한 대나무 정자 묵은각(墨隱閣), 천장 유리에 소나무와 매화가 드리운 황토방 통천옥(通天獄)도 손수 지었다.
뜰엔 꿩이 날아들고 산토끼도 드나든다. 가을이면 연못에 기러기가 내려앉아 노닌다. 집 뒤 솔숲에선 뻐꾸기가 우짖고 고라니가 뛰어다닌다. "나이 들어 거동 불편해지면 뜰이 소재가 될 거라는 생각에서 꾸몄지요. 모네의 수련 정원처럼." 그는 "그래서 집은 화가에게 중요하다. 집이 삶이다"라고 했다.
박대성과 경주의 인연은 어릴 적으로 거슬러간다. 경북 청도에서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1949년 빨치산들에게 '반동지주'로 지목돼 살해당했다. 빨치산들은 아버지에게 낫을 휘둘렀다. 아버지 등에 업혀 있던 네 살 박대성은 왼팔 팔꿈치 아래를 잃었다.
그가 예닐곱 살 때 학교 선생님이던 맏형이 솔거 이야기를 들려 줬다. 가난했지만 마당에 꼬챙이로, 삽에 숯으로 그림을 그린 끝에 경주 황룡사 벽화를 남겼다는 신라 천재 솔거 얘기였다. 어린 동생이 팔 하나 없는 어려움을 이겨낼 길로 그림을 생각한 형의 바람대로 그는 그리기 시작했다. 계시(啓示)처럼 경주로 신라를 찾아오기까지 그로부터 40년이 걸렸다.
박대성은 아이들 놀림을 견디다 못해 중학교까지만 다녔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그는 "오다가 이리 처박히고 저리 꼬꾸라지고 번갯불 같은 어른을 만나기도 하며 독학의 길을 걸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없어진 한쪽 팔이 제일 큰 스승이었다. 심신을 혹독하게 몰아붙이며 남보다 더 그렸고 더 고뇌했다. 몸을 내돌리지 않으면 정신을 시퍼렇게 벼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20대였던 1970년대, 국전에서 내리 여덟 번을 수상하며 동양화단을 흔들었다.
그는 74년 후견인 주선으로 대만 고궁박물관에 여섯 달 연수를 갔다. 수장고에서 하루 한두 점씩 중국 고미술 작품을 꺼내보는 행운을 누렸다. 그는 "엄청나게 넓은 중국 미술의 스펙트럼을 보며 회화의 고정관념을 깼다. 내 서화관(書畵觀)을 열고 세웠다"고 했다. 80년대엔 중국 우루무치부터 히말라야 넘어 실크로드를 갔고, 카슈미르·인도·중동을 돌아다녔다.
94년엔 오래전부터 그를 압박해 온 현대미술의 정체를 찾아 뉴욕 소호로 떠났다. 창고 얻어 작업도 하고 유명 화가들 강의도 들었다. 1년 돼 가던 어느날 수채화 수업에서 우리 먹과 붓으로 순식간에 작품을 그려냈더니 선생이 경악했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 것 모르고 남의 것부터 찾았구나. 우리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인데.' 뇌리에 번쩍하고 경주가 떠올랐다.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그날로 보따리 싸 들고 돌아와 이튿날 불국사로 내려왔다.
박대성은 다짜고짜 스님들을 붙들고 통사정해 기거할 방을 얻었다. 11월 불국사에서 맞은 첫 밤 대웅전 앞마당에 서니 타임머신 타고 신라에 온 듯했다. 얼마나 흥분했던지 쉴 새 없이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아홉 차례나 들락거렸다. 그는 "석가탑과 다보탑 사이 정중앙에 뜨는 정월 보름달은 심장이 떨려 5분을 못 본다"고도 했다.
이듬해 초 매운 겨울날, 불국사에 7년 동안 눈이 안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함께 묵던 제자에게 "불국사 설경을 그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하곤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제자가 깨워서 보니 하얗게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20분 만에 그쳤고 두 시간 만에 녹아 버렸다. 그 사이 정신없이 스케치를 했다. 그날 감격은 드물게 불국사 전경(全景)을 다 아우른 가로 8m, 세로 2.7m 대작 '불국 설경'으로 태어났다.
그에게 경주는 신화의 동네다. 영적(靈的) 기운을 뿜어낸다. 그는 "경주 살다 보면 때때로 현실세계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달밤이나 안개 낀 날, 집 뒤 왕릉에 나와 보면 더욱 그렇다. 그의 집이 깃들인 남산도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경주는 개발이 제한돼 하늘이 넓게 보이고 자연 그대로를 간직한 곳이 많다. 그것만으로도 작가의 창의적 기운을 북돋아 준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지금의 경주를 지켜 준 경주 사람들이 그는 고맙다. 그 깊은 정신이 존경스럽다.
박대성은 "경주야말로 작가가 살 만한 곳"이라고 했다. 불국사를 지은 김대성과 이름이 같은 것만 봐도 "경주는 내게 인연을 넘어 운명"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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