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 산악인 엄홍길
전날 어지간히 마셨나 보다. 그의 날숨에선 알코올의 사체인 탄산가스 냄새가 났다. "해장 좀 해야겠다"더니 그가 속도를 낸다. 따라잡을 수 있을까. 언감생심. 놓쳤나 싶어 두리번거리면 그는 저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한다. "올라오세요…. 할 수 있어요." 겨우 올라와 숨 좀 돌리겠다 싶으면 그는 다시 등을 보이고 올라간다. 매정하게도. 그와의 차이는 또 아까만큼이다. 올라갈 수 있을까. 막막하긴 하지만, 전혀 불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와 산에 가본 사람들은 안다. 그는 누구보다도 '훨씬' 빨리 걸을 수 있지만 그저 '조금' 빨리 걷는다는 것, 그리고 또 누구도 결코 낙오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 에베레스트, 마나슬루, 낭가파르바트 등 세상의 지붕 같은 봉우리(8000m 이상) 16좌를 완등한 '엄대장' 엄홍길(嚴弘吉·50)은 얕은 산을 걷기에도 괜찮은 벗이다.
산 좋아하는 이들에게 의정부는 만만한 산이 지천이다. 바위 좋은 수락산(637m), 능선 좋은 사패산(552m), 숲이 좋은 천보산(336m). 그리고 빼놓으면 섭섭한 원도봉(原道峰)산. 원도봉산은 도봉산국립공원(자운봉·739m)의 일부로 공식 명칭은 아니다. 하지만 등산객들은 서울 우이동에서 올라가는 도봉산과 구분, 다락원능선-회룡능선에 '원'자를 붙여 부른다. 세계 정상의 산에 올랐지만 엄대장은 "중요한 생각을 할 게 있을 때마다" 수시로 원도봉에 오른다.
호원동에 위치한 '엄홍길기념관'은 원도봉에 오르는 이들에게 익숙한 집결지다. 14좌 완등을 기념, 의정부시에서 2003년 만들었다. 2007년 완공한 더 큰 규모의 엄홍길전시관은 경남 고성에 있다.
기념관이 두 개인 데는 사연이 있다. 고성은 그가 태어난 곳. 의정부, 그중 원도봉은 그가 세 살 때부터 살았던 두 번째 고향이다. 그의 양친은 산에서 매점을 했다(무허가 건물인 이 자리는 2000년 철거됐고 지금은 표지만 남았다). 산아래 마을까지는 30분이 걸리는 곳, 전기도 친구도 없었던 산에서 아이가 할 수 있는 건, 칡넝쿨로 타잔놀이하고, 송이 캐먹고 산에 오르는 일이었다. "저 바위, 뭐처럼 보여요? 딱 두꺼비 같죠." "냄새 좋죠? 생강나무예요. 좀 맡아봐요" "민초샘 물맛 최고죠" 그는 하루에 열 번씩, 수십 년째 아들 자랑을 하고도 전혀 지치지 않는 노모처럼 원도봉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왕위를 태종에게 빼앗긴 태조가 머물며 6조판서들과 정사를 의논했다 하여 붙은 이름 '의정부(議政府)'. 의정부는 맞대고 살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완충지대였다. 현대사에서도 그곳은 스펀지 같았다. 푸성귀가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캠프 폴링워터, 라가디아 등 8개 부대에서 흘러나온 햄이나 베이컨은 느끼하고 부담스러운 식료였다. 먹을 건 없고, 꾀는 많았던 이들은 이것에 김치와 고춧가루, 고추장을 더해 찌개로 끓여냈다. '의정부 부대찌개'는 그렇게 미군과 한국의 음식문화가 서로를 부인하며, 인정하며 만들어낸 음식이다.
산에서 살던 꼬마 엄홍길이라고 해서, 군사 도시의 추억이 없는 건 아니다. 산 위에 있던 미군 포(砲)부대에는 군속 30여명이 배치됐고, 그들은 큰길에서 받은 보급품을 지고 올라가다 산중턱 매점에 들러 쉬었다. 소년은 초콜릿이나 햄, 빠삭이(시리얼)와 바나나로 미국이란 나라를 알게 됐다. "남편 따라온 미군 부인이 산 근처 민가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서 절 입양하겠다고 했었어요. 그때 입양됐으면 인생 참 많이 달라졌겠죠."
미국으로 입양됐더라도, 산이 아니었다면, 남극탐험대에라도 들어갔을 위인이다. "육지에선 날고뛰었다. 이젠 다른 데로 가보자"며 해군에 지원했던 엄홍길. 가보니 날고뛸 일은 없었다. 부대 임무는 취사병과 배를 수리하는 폐선요원. 이게 아니다 싶을 때, 해군 특수전여단 수중폭파대(UDT) 모집 공고를 봤다. UDT에선 몸이 고되 아침마다 후회했으면서도 그렇게 굴러야 사는 것 같았다. 지난 3월 30일 순직한 고 한주호 준위와는 82년 5월부터 진해에서 2년여를 함께 복무했다.
요즘 의정부는 새 도시 계획을 짜느라 분주하다. 미군기지 이전에 따라 공원이 생기고, 대학도 들어선다. 엄홍길 마음에도 변화가 왔다. 16좌를 완등하며 마음 깊은 곳에 새겼던 다짐을 꺼내어 세상에 내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돌려줄 사랑에 관한 일이다.
2008년 출범한 NGO '엄홍길휴먼재단'은 그 출발이었다. 첫 결실로 오는 5월 5일 네팔의 오지마을 팡보체(3950m)에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은 학교' 팡보체휴먼스쿨의 준공식을 갖는다. 건물만 지으면 뭐하나 싶어, 재단에서 교사 두 명과 간호사도 채용했다. 돈도 힘도 많이 들었지만 거기 지어야 할 이유는 분명했다. 87년 두 번째 에베레스트 도전 때 추락해 사망한 셰르파 술딤 도르지가 살던 곳이다. 카트만두 외곽 농촌 마을 타르푸에 짓고 있는 초등학교는 11월 완공된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卿) 이후 산악인이 네팔에 시설을 지어 기부하는 것은 처음이다.
'작은 탱크' 엄대장은 1985년 이런 생각으로 8000m에 도전했었다. "에베레스트(8848m)가 별거냐. 한라산(1950m) 네 개 합친 거 아니냐?" 이런 배짱으로 그는 이제 산(山) 대신 사람들 속으로 나선다. 고성, 의정부에 이어 네팔은 그에게 세 번째 고향이 되는 셈이고, 그 고향 숫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좋은 고향은, 낯선 땅도 고향으로 품게 만든다.
/ 박은주 엔터테인먼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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