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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가는 피맛골 '청일집'

라이프(life)/술

by 굴재사람 2010. 2. 6.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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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박물관 가는 피맛골 '청일집'

/ 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

 

 

영국 더타임스 서울지국장 앤드류 새먼이 런던에 갈 때면 들르는 단골술집이 있다. 템스강변 선창가, 낡은 창고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에 있는 집이다. 이 집은 1520년 '악마의 선술집'이라는 이름으로 문 열어 500년 가까이 한자리에서 영업 중이다. 좁은 골목길이 엉킨 동네의 허름한 집이지만 맥주 값이 적당하고 안주가 맛있어 가볍게 한잔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 화가 터너도 단골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외국 관광객들까지 몰린다.

로마베니스에 가도 꼬불꼬불한 골목길에 한자리에서 몇백 년 영업을 해 온 스파게티집, 피자집이 즐비하다. 이 식당들은 음식 맛뿐 아니라 오래된 전통, 다녀간 저명 문화예술인들 이름을 자랑으로 내세운다. 유럽은 도시마다 고유한 멋을 불어넣는 업소를 마구잡이로 헐거나 뜯어고칠 수 없게 국가가 엄격하게 규제한다. 한자리에 오래 있는 것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함부로 허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의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울도 오래된 건축이라면 남부럽지 않게 많았었다. 그러나 허물고 높다랗게 짓는 것만을 좋은 것으로 아는 개발이익 지상주의가 판치면서 서울의 옛 자취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정도(定都) 600년을 넘겼다지만 한자리에서 60년을 넘긴 음식점, 가게, 회사 건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 도심 청진동 피맛골 일대 재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이곳에 마지막까지 남아 영업하던 청일집이 어제 문을 닫았다. 광복 직후 문을 열어 열차집, 경원집 등과 함께 막걸리와 빈대떡, 족발 안주로 주머니 가벼운 서민의 발길을 불러 모은 사랑방이었다. 서울 역사박물관은 청일집의 탁자와 술잔, 메뉴판, 벽의 낙서들을 통째로 옮겨 보존 전시하기로 했다.

▶술집 풍경을 박물관에 옮겨 전시하기로 한 결정을 그나마 평가해줘야 할까.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산물은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생명이 있는 법이다. 청일집도 그것이 조선시대 이래 서민의 애환이 서린 피맛골에서 손님을 맞을 때 더 빛이 난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늘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을 너무 쉽게 허물고 뒤늦게 복원하겠다고 호들갑을 떤다. 이익을 위해서라지만 원래 있던 장소에 살아 있게 하는 것이 더 큰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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