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아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로 꼽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200년이란 세월을 거슬러 현대에 그 사상과 학문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인 실용학문과 그의 방대한 사상, 엄청난 저술 등이 현대적 시각에서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다닌 길도 그의 사상을 담아 길 위에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의 저술과 사상, 그 자체만으로도 당연히 재조명되어야 하지만 그가 저술할 당시 유배 중이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다. 만약 그가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 방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을까 하는 점에서는 오히려 역설적이다. 18년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동안 그는 500여권의 책을 남겼다. 정치, 경제, 철학, 지리 등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정조의 총애를 받고 잘 나가던 관리였던 다산이 정조의 승하직후인 순조1년(180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 때 서학과의 관련 혐의로 경상도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됐다. 정조대왕을 받들어 수원성을 설계, 축성하고, 천주교 관련자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극심한 당파로 그의 공로는 모두 사라지고, 반대파들에 의해 멸문지화 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그의 형 정약종은 참수형을 당하고, 큰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그는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의 누나의 남편인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이승훈도 참수형에 처해졌다.
돌아올 기약도 없이 떠난 그의 첫 유배지가 강진 읍내 주막이다. 당시 유배자에게는 지역만 정해주고 따로 거처는 마련해주지 않았다. 반기는 이 하나 없는 강진의 주막에서 다산은 상심의 세월을 술로 지새웠다.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가다듬고 그의 거처를 ‘네 가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지켜라’는 뜻의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붙이고, 1802년 가을쯤부터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서당을 개설했다. 다산의 첫 제자 황상을 시작으로 강진읍 6제자와 다산초당 18제자 등이 이후 속속 그의 문하에 들어와 수학했다.
주막 할머니와 그녀의 외동딸의 보살핌으로 1801년 11월22일~1805년 10월8일까지 약 4년을 보낸 다산은 주막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유배 온 실학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당시 백련사 주지 혜장법사를 만나게 된다.
혜장은 다산의 학문의 깊이에 반하여 ‘정대부’라 부르며 존경하게 되었고, 다산은 그의 도움으로 강진읍 뒷산에 위치한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곳에서 1806년 8월30일까지 1년 가까이 혜장법사와 학문적 교류를 돈독히 다졌다.
강진읍에 거주한 제자 이학래는 그의 스승이 산 중에서 혼자 쓸쓸히 지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의 집으로 오실 것으로 간곡히 요청했다. 다산은 1806년 9월1일 제자 집으로 옮겨 후학을 가르치는데 더욱 매진하게 된다. 이학래의 집에는 1807년 12월30일까지 기거했다.
이듬해 제자들과 그의 학문적 깊이를 높이 산 지인, 특히 윤씨들이 탐진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귤동마을 만덕산 자락에 다산초당을 마련했다. 그의 형 정약전이 유배 간 흑산도도 맑은 날이면 보이는 곳이다. 다산은 여기서 유배생활이 끝날 때까지 10여 년간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수많은 저서를 이 때 쏟아냈다.
불행과 절망의 늪에서도 절대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던 다산의 인생관이 있었기에 오늘의 ‘위대한 사상가’ 다산이 존재할 것이다. 오늘의 다산은 ‘다산유배길’로 다시 태어났다. 그가 다니던 길, 즉 강진 다산수련원에서 다산초당~보은산 보은산방까지 다산의 사상을 녹여내고 있는 것이다.
출발은 다산수련원이다. 강진군에서 다산의 실용주의 사상과 실사구시 정신을 널리 알리고, 배우고 닦을 목적으로 지난 2005년 개관했다. 2007년 9월부터 광주YMCA에서 위탁운영하고 있다. 다산수련원은 널찍한 주차장에 다산유물관까지 갖추고 있어 출발지점으로 안성맞춤이다.
다산수련원 바로 옆에는 10년 전 조성한 두충나무 사이로 나 있는 길이 다산수련원과 다산초당 가는 길로 연결된다. 껍질을 벗겨 한약재로 쓰는 나무가 바로 두충나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산이 밀려들어와 가격경쟁력이 안돼 그냥 방치한 게 숲을 이루게 됐다고 한다. 마치 버드나무 같이 죽죽 뻗은 나무들이 아름답게 늘어 서있다. 시쳇말로 죽죽빵빵 같은 나무다. 다산유배길은 처음부터 탐방객을 매료시켰다.
길은 다산초당으로 가는 만덕산 등산로와 연결됐다. 숲이 우거져 있고, 나무뿌리들이 땅 위에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길이었다. 정호승 시인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대나무밭에서나 보던 땅 위로 솟은 뿌리들을 소나무숲에서도 볼 수 있는 길이다. 기묘한 모습이다.
다산초당에는 다산의 정취가 묻은 3개의 길이 있다. 그 하나가 지금 걷고 있는 ‘뿌리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다산초당의 동암을 지나 천일각 왼편으로 나 있는 ‘백련사 가는 길’, 나머지가 다산의 제자 윤종진의 묘 앞에 나 있는 ‘오솔길’이다. 오솔길과 뿌리의 길은 바로 연결된다.
뿌리의 길을 지나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산초당이 모습을 보였다. 한국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10년 동안 지냈던 집이다. 강진에서 4번이나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마지막으로 묵었던 곳이다. 제자들과 학문의 깊이를 더했고, 학문적으로도 집대성한 곳이기도 하다.
원래 다산초당은 다산의 외가인 귤동마을 윤취서에 의해 건립된 해남 윤씨의 산정(山亭)이었다. 그러다 다산이 기거하면서 만덕산 기슭에 자생하는 녹차들을 보고 ‘다산(茶山)’이란 호를 붙였다. 다산은 원래 이곳의 고유지명이었다.
다산초당엔 본채인 다산초당과 다산선생이 거처했던 동암, 제자들이 유숙했던 서암으로 구성돼 있다. 다산초당에는 다산이 남긴 흔적 가운데 4개를 꼽아 다산4경으로 이름 붙였다.
그 1경이 ‘丁石(정석)’이다. 초당 뒤꼍 커다란 바위에 다산이 직접 새긴 글이다. 자신의 성(姓)에 돌 석(石)자 한글자만을 새겨, 군더더기 없는 깔끔하고 강인한 그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는 듯했다.
2경은 다산이 직접 수맥을 잡아 팠다는 ‘약천(藥泉)’이라는 샘이다.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 이 샘물은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다산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샘은 있지만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3경은 차를 끊일 때 사용했다는 마당에 있는 평평한 돌인 ‘다조(茶竈)’. 일종의 차 끊이는 부뚜막이었다.
4경이 초당 옆에 있는 연못인 ‘연지석가산(蓮池石山假)’. 바닷가에 있는 반들반들한 돌을 주워 봉우리를 쌓아 석가산이라 했고, 그 주변 연못엔 잉어를 키웠다. 다산은 자라는 잉어를 보고 날씨를 예측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반들반들한 돌은 없어지고 그냥 볼품없는 돌만 남아 세월의 흔적을 대변하고 있었다.
바로 옆엔 천일각이란 정자가 있다. 다산이 그의 형 정약전이 유배 간 흑산도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없었던 정자였지만 다산의 당시 심정을 회상하며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건립했다.
이제부터 백련사 가는 길이다. 다산유배길에서 만날 수 있는 세 가지 길 중에서 가장 다산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던 통로였다. 1㎞가 채 안되는 거리에 야생 녹차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숲을 만날 수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길이기도 하다.
이 아름다운 길을 두 사람이 오고가면서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그 시절로 돌아가 상상의 나래를 한번 펼쳐보자.
“실학은 실생활에서 도움 되는 학문을 배우자는 것인데, 불교의 가르침은 무엇인가요?”
“그 실학을 제대로 배우기 위한 마음을 가다듬자는 것이지요. 소생이 부처님의 그 깊고 깊은 뜻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소만, 실학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둘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자가 많은 이 나라가 어찌 이렇게 당파가 극심해 혼란해졌을까요?”
“제대로 배우지 못한 까닭이겠지요. 가다듬지 못한 마음으로 사익을 앞세운 배움 때문 아니겠는지요.”
동백과 야생녹차,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고가는 길 위의 아름다운 자연에 흠뻑 젖어 두 선인은 분명 선문답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으리라. 그리고 다산 스스로 학문의 깊이를 더했을 그런 산책로였을 것이다.
묘하게도 백련사는 백련결사로 유명한 고려시대 불교 개혁운동의 본산이었던 곳이며, 혜장스님은 그 백련사의 주지였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의 병폐를 인식하고 실생활 중심의 학문을 주장한 다산이 혜장과의 만남은 시대를 뛰어넘은 화두가 일치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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