꾼은 울려고 달린다
내가 이렇게 뜀박질꾼으로 변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마누라 덕분에 밥 잘 챙겨 먹은 탓인지 풍선처럼 불어난 몸을 주체할 수 없어 단단히 각오를 하고 시작한 달리기였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16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서 이제 마라톤 30회 완주를 눈앞에 두게 됐으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마라톤이라는 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참 싱겁고 재미없는 운동이다. 처음 운동복을 챙겨 입고 학교 운동장이나 새벽 길바닥으로 나서면 그 쑥스러움이란 꼭 남자가 치마를 입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으름과 식탐에 빠져있는 몸뚱어리가 쉽게 받아줄 리 없고, 아프고 저려오는 다리와 금방 넘어갈 것 같은 숨 막힘에 당장 멈추고 싶었지만 차마 그것만은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매일 일수 찍듯이 뛴 것이 이렇게 되었다.
부산 외곽 강변에 살 때, 나는 항상 버스 토큰을 호주머니에 넣고 강변도로를 달렸다. 그냥 허락하는 데까지 뛰다가 한계다 싶으면 버스를 타고 되돌아오려는 생각에서다. 이른 새벽 부산 자갈치시장에 생선 떼러 가는 할머니들로 가득 찬 버스 안에서 녹색 추리닝에 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내 모습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등바등 고생한 덕분에 집도 좀 넓은 곳으로 옮기고, 내 몸도 그것만큼 실해져서 이제 녹색 추리닝보다는 검정 타이츠가 더 잘 어울렸다. 아침운동 시간을 잘못 잡으면 등교하는 중고생들과 맞닥뜨리곤 했다. 딸이 친구들과 내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타이츠가 얼마나 비싼 운동복인지 모르는 애들이 나를 보고 내복 차림으로 뛰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고 한다. 딸은 집에 돌아와 "나 홍당무 됐다"면서 울상이었다. 그 딸아이가 지금은 아비와 같이 마라톤 마니아가 되어 있다.
이틀만 연달아 뛰지 않으면 온몸이 근질근질하고 괜히 신경질이 도진다. 꼭 암내 맡은 살쾡이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기어코 한바탕 뛰고 나면 히죽히죽 웃음이 나온다. 이런 것이 사람에게 아직 남아 있는 '동물적인 근성'이라는 생각도 든다.
골프에 미친 사람은 정원의 잔디만 봐도 필드가 생각난다고 한다. 뜀박질에 미친 사람은 한적하고 잘 포장된 구불구불한 아스팔트길을 보면 한바탕 뛰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달리기를 원시적인 운동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이만큼 과학적이고 과정에 따른 결과가 정확한 운동도 없다.
지금은 각 지방자치단체나 신문사에서 개최하는 마라톤 대회가 수없이 많지만 십수년 전에는 1년에 네다섯 개의 대회가 전부였다. 그때에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뜀박질꾼들이 이곳저곳 대회가 있을 때마다 기웃거려서 서로 안면도 통했다. "내가 먼저 결승선을 끊겠다"는 마음속 갈고리는 숨겨놓은 채 겉으로는 반가운 척 손을 잡고 흔들어댔다.
누구나 똑같이 100리 길을 재주껏 달리는 것이다. 평소에 흘린 땀의 양이 한 방울도 틀리지 않게 결과로 나타난다. 초반이나 중반에 욕심 부리면 여지없이 기록으로 응징을 받는다. 절제 없는 욕심은 너무나 큰 고통을 가져다준다. 끝나고 나면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골프의 신(神)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것을 마라톤의 신이라고 이름 지었다. 마라톤의 신을 속여 보려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코 신은 속지 않았다.
내가 이 신(神)과 가장 많이 뛰놀던 곳은 춘천이다. 부산 사람에게 춘천은 참 멀고 낯선 도시였다. 마라톤이라는 것 하나를 위해 12년 동안 가을이면 이 도시를 찾고 있다. 이제는 그 호반의 단풍이 내 인생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얻은 것이 '명예의 전당'. 한 해 한 해를 빈 마음으로 춘천을 찾은 것이 이렇게 되었다.
뜀박질꾼들은 세 번의 '느낌'을 받는다. 먼저 전쟁터의 전사(戰士)의 기분이 된다. 헬리콥터 때문이다. 마라톤 대회에는 어김없이 헬리콥터가 떠서 굉음과 거친 바람을 출발을 기다리는 꾼들의 머리 위에 내리쏟는다. 그 아래에 있으면 출전을 기다리는 전사가 되고 긴장 속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비장감이 가슴을 휘돈다.
그다음은 파스의 추억이다. 바르는 파스, 붙이는 파스, 뿌리는 파스, 제각각의 파스들이 운동장을 뒤덮는다. 뜀박질꾼들이 모인 곳에는 어디서나 파스 냄새가 진동한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이지만 회상하면 가장 맡고 싶은 것이 이 파스 냄새이다. 이것도 맡다가 보면 중독성이 있는 모양이다.
마지막은 눈물이다. 해본 꾼들만이 안다. 어쩌면 이렇게 울어보려고 끝까지 달려왔는지도 모른다. 100리 길의 끝이 눈앞에 보이면 가슴이 요동치면서 코끝이 시큰거린다. 나도 모르게 눈물샘이 작동을 한다. 눈은 울고 입은 웃는다.
여기까지 함께 온 수많은 꾼들은 이런 느낌을 맛보기 위해 오늘도 뛰는지 모르겠다. 그 속에는 물론 나도 섞여 있을 것이다. 나의 마라톤 여정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기도한다. 내 몸이 허락하게 해달라고, 내 마음속에 갈망이 남아 있게 해달라고. 그때까지는 뛰게 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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