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닿는 곳에 길이 있었습니다
2009 문화일보가 걸었던 ‘길 중의 길’ 4選
올 한 해, 여행의 화두는 단연 ‘길’이었습니다. 돌이켜보자면 여행의 트렌드는 2~3년을 주기로 달라져 왔습니다. 아파트를 방불케 하는 고층 콘도미니엄의 편리함이 대세였던 적도 있었고,동화 속 같은 이국적 펜션여행이 주를 이뤘던 때도 있었습니다. 뒤이어 감자와 고구마를 캐거나 떡을 빚는 체험여행이 붐을 이뤘습니다. 그리고 이제 ‘길’이 명실상부한 여행의 중심이 됐습니다. 여행자들이 싱그러운 자연 속을, 혹은 두터운 역사 공간을 걷는 일의 행복함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지요.
걷는 여행 붐의 출발점은 논란의 여지없이 제주의 ‘올레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08년 늦봄 무렵에 처음 놓인 제주의 올레 길은 올해 단연 최고의 히트상품이었습니다. 이제는 ‘올레’란 말이 곧 걷는 길을 뜻하는 대명사가 됐을 정도니까요. 뒤이어 지리산 자락의 마을을 도는 ‘지리산 둘레길’이 놓였고, 전국 각지에 앞다퉈 걷는 길들이 놓였습니다. 걷는 일이 여행의 대세가 됐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걷는 여행이란 이동의 수단이 차가 아닌 두 발이 됐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지요. 사실 여행을 떠난다는 의미 자체가 ‘길 위에 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전의 여행이 ‘길 끝의 목적지’에 집중하는 것이었다면, 이즈음의 걷기여행은 목적지보다는 길 자체에 집중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지요. 여기다가 걷기여행으로 이른바 ‘저비용 여행’을 가능케 했다는 점도 평가할 만합니다. 사실 걷기여행이 대세를 이루기 전까지만 해도 여행의 품질은 비용에 비례했습니다. 고소득층을 겨냥해 분양 목적으로 세운 으리으리한 최고급 콘도미니엄이나 하룻밤 숙박료가 수십만원을 넘는 특급호텔이나 호화판 펜션에서 묵는 것이 좀 더 나은 여행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걷기여행이란 ‘고비용 여행’과는 달리 소박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아무래도 걷는 여행은 고급스럽고 호화로운 특급호텔보다는 소박한 민박집이 더 어울리는 것이지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즈음, 지난 한 해 동안 ‘EZ 여행’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여행지들을 정리하며 그간 소개했던 길 중에서 최고의 길 4곳을 꼽아봤습니다. 지난 한 해 제주에서는 맑은 바다와 가장 가까이 걷는 한담~곽지 간 산책로를 만났고, 경북 영양군 수비면의 대티골에서는 짙은 초록색이 온몸에 묻어날 것 같은 숲길을 걸어봤습니다. 여기다가 초가을 함안에서 마주쳤던 끝없이 이어진 코스모스 제방 길도 꼽아봤습니다. 깊은 가을에 다녀왔던 대승사의 암자인 묘적암으로 오르는 가을 낙엽길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여기에 꼽은 4개의 길은 지리산 둘레길처럼 긴 길도 아니고, 올레길처럼 이름난 길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연과 함께 숨 쉴 수 있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길임을 자부합니다. 풋풋한 풀 냄새와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 발바닥에 폭신하게 느껴지는 촉감까지 모두 느낄 수 있는 곳들입니다. 되도록 계절에 맞추면 더 좋겠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좋겠습니다. 아마도 이 길을 걷게 된다면 목적지에만 눈을 두지 않고 그저 길을 느끼며 걷는 일이, 고즈넉한 길에서 제 숨소리를 제 귀로 듣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1.제주 애월 해안길 - 비췻빛 바다 끼고 ‘낭만 산책’ 제주는 걷기여행의 ‘성지(聖地)’나 다름없다. 물론 올레길 덕분이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올레길이 아니더라도 도보여행자들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해안도로와 마을 길을 잇는 올레길에서도 그렇지만, 올레길이 만들어지지 않은 구간에서도 운동화차림에 배낭을 메고 모자를 쓴 여행자들과 흔하게 마주친다. 젊은 청춘들은 물론이고 황혼기에 들어선 노년의 부부들도 제주의 길을 걷는다. 이들 도보 여행자들이 제주의 바다를 배경으로 한적한 해안길을 걷는 모습은 스스로에게도 즐거움이겠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도 낭만적인 한 폭의 그림을 선사한다. 비록 올레길의 구간에 편입되지 않았으되, 가장 아름다운 제주의 길로 꼽을 만한 길. 그 길이 바로 제주시 한담마을에서 곽지해수욕장을 잇는 산책길이다. 하귀 ~ 애월 간 해안도로의 끝머리쯤에서 내려다보면 투명한 바다가 그리는 곡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가 바로 그곳이다. 제주에는 푸른 보석 같은 색감의 바다도 많고, 바다를 끼고 나있는 길들도 많지만, 이곳처럼 맑은 바다를 가깝게 끼고 걷는 길은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길의 아름다움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날씨도 맑으면 비췻빛으로 빛나는 바다색이 좋고, 흐리면 그것대로 부드러운 길의 곡선이 더 또렷해진다. 이 길을 걷는 시간을 고를 수 있다면 단언컨대 해질 무렵을 추천한다. 낙조 무렵의 애월 바다의 낭만적인 풍경을 끼고 걷는 경험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추억이 된다. ◆ 가는 길 = 제주 공항에서 나와 한림방면으로 다시 우회전해 일주도로 이호방면으로 우회전, 여기서 16.8㎞를 간 뒤 애월방면으로 우회전하면 커피숍 애월키친과 한담소공원이 나온다. 소공원에서 내려다보면 산책로가 보인다. 2. 영양 대티골 숲길 - 오지 중의 오지… ‘치유의 숲’ 경북 영양은 고속도로며 국도가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는 이즈음에도 오지 중의 오지로 꼽히는 곳. ‘육지 속의 섬’이란 별칭도 그래서 붙여진 것이다. 워낙 깊은 곳이라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비경이나, 수십년 전쯤의 옛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들도 많다. 여름이면 수하천 위로 반딧불이가 반짝이고, 산중으로 들어서면 노루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영양군 일월면 용화2리 대티골마을은 오지인 영양에서도 가장 깊은 골로 꼽히는 곳이다. 대티골은 ‘자연치유 생태마을’을 내세운 곳답게 도시생활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자연으로 치유할 수 있는 곳이다. 대티골에서 압권은 바로 숲길이다. 숲길 탐방로는 윗대티 마을에서 출발하는 세 가지 코스. 5KM의 옛 국도길과 2km의 산판길, 1km 남짓의 마을길이 서로 교차하면서 만난다. 모든 길이 경사가 완만해 서늘한 숲터널과 맑은 계곡, 금강송 임도길을 여유 있게 돌아볼 수 있다. 자연림으로 이뤄진 숲길에 들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청정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 길 위에서 경험하는 것은 때묻지 않은 자연이 주는 위안과 휴식이다. 대티골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자연 뿐만은 아니다. 친환경농법으로 두메부추, 산마늘 같은 토종 야채를 심어 기르고 있는 마을 주민들이 외지 방문객들을 위한 깔끔한 너와 황토가옥을 지어놓았다. 새로 지은 황토가옥은 정갈하다. 주민들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토종 야채와 건강한 재료로 지은 먹을거리를 내놓고 있다. 황토가옥에 들어 낮이면 통창으로 자연을 내다보고, 밤이면 툇마루에 앉아 머리 위로 쏟아질 듯한 별빛을 올려다보는 맛도 일품이다. ◆ 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풍기나들목에서 내려 36번 국도를 타고 영주, 봉화를 거치고 법전을 지나 35번 국도로 갈아타고 영양 방면으로 가다보면 도로 왼편으로 대티골을 알리는 입간판이 서있다. 3. 함안 악양제방 길 - 끝없이 펼쳐진 코스모스 꽃길 길가에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풍경쯤이야 우리 땅 어디엔들 없을까. 그러나 경남 함안군 법수면의 악양제방에 펼쳐진 코스모스 꽃길을 마주하면 입이 딱 벌어진다. 꽃길이라고 다 같은 꽃길이 아니다. 끝이 없이 이어진 화사한 꽃길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 본래 홍수가 잦았던 함안 땅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제방을 쌓아왔다. 믿기지 않지만 함안군 내 제방을 다 잇는다면 무려 383km에 달한단다. 대산면 악양제방에 조성된 코스모스 꽃길을, 지도를 놓고 어림잡아 재보아도 7∼8km에 달한다. 아마도 이곳이 전국에서 가장 긴 꽃길이리라. 길가에 촘촘하게 심어진 코스모스는 마치 노련한 정원사가 전정가위로 정리해 놓은 듯 워낙 잘 가꿔져 있다. 청명한 가을날, 코스모스가 만개한 이 길에 오른다면 발걸음은 경쾌해지고 휘파람이 절로 나오게 된다. 제방에 조성된 꽃길이니 만치 탄력 있는 흙길은 평탄하다. 자전거라도 가져가 꽃길 제방을 달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코스모스 꽃길은 남강과 함안천 합류지점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꽃길을 걷기 전에 강변 절벽에 솟아있는 누각 악양루에 먼저 오르는 게 순서다. 악양루에 올라보면 남강과 함안천의 유장한 물굽이와 함께 코스모스로 가득한 악양제방과 너른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누각에 기대서 강물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황홀한 낙조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 풍경이 마음속에 인화돼 오랫동안 남아있으리라. 경남 함안은 수도권에서 워낙 멀기도 하지만, 이렇다 할 명소가 없어 여행지로는 낯선 곳. 그러나 코스모스 꽃길 하나만으로도 가을날, 함안에 갈 이유는 충분하다. ◆ 가는 길 = 경부나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까지 가서 대전 ~ 통영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진주분기점에서 남해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진주방면으로 향한다. 남해고속도로 함안나들목으로 나와 1011번 지방도로를 따라 대산방면으로 향하면 악양제방이 나온다. 4. 문경 묘적암 길 - 낙엽 뒤덮인 돌계단 매혹적 문경에서 ‘길’이라면 대번에 새재 옛길을 떠올리겠지만, 그보다 더 빼어난 길이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의 대승사에 있다. 길이 가진 역사성이야 새재 옛길을 당할 도리가 없지만, 고즈넉한 길의 정취로 따지자면야 대승사 부속암자인 윤필암, 묘적암으로 이어진 숲길에 훨씬 높은 점수를 주어야 마땅하겠다. 먼저 대승사는 주지 철산 스님과 수행자들의 맑은 정신이 출렁이는 곳이다. 대승사의 선원은 혹독한 수행법으로 유명한 서슬 퍼런 가풍의 절집. 어쩌면 윤필암과 묘적암으로 이어지는 숲길도 절집이 갖춘 수행의 정신 때문에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윤필암은 곧바로 차로 가 닿을 수도 있지만, 대승사 접견실 옆으로 난 샛길을 따라가는 길을 택하는 편이 낫다. 산자락을 타고 도는 이 길에서는 윤필암으로 바로 내려서지 말고 사불바위 쪽으로 차고 올라가는 길을 먼저 오르길 권한다. 사불바위에 오르면 발아래로 윤필암의 단아한 법당들이 펼쳐지고 맞은 편 산자락의 8분 능선쯤에 소박한 암자 묘적암이 건너다보인다. 암자 순례길의 백미는 윤필암에서 묘적암에 이르는 구간. 그중에서도 윤필암과 묘적암의 중간쯤에서 마애여래좌상을 만나러 올라가는 계단 길의 정취가 으뜸이다. 온통 낙엽으로 뒤덮인 돌계단 길은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듯 부드럽게 휘어진 곡선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묘적암에 이르는 길은 깊고 아늑한 숲길이다. 아름드리 소나무며 전나무들이 우뚝 솟아있고, 발밑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린 낙엽들이 기분 좋게 서걱거린다. 길 끝의 묘적암은 툇마루가 놓인 허름한 시골집 같지만 신라말의 고승 나옹 스님이 출가한 유서깊은 암자다. 마당엔 나옹이 물을 뿌리자 마음 심(心) 자가 나타났다는 돌이 놓여 있다. ◆ 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 여주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충주 쪽으로 향하다 점촌·함창나들목으로 나온다. 34번 국도를 타고 예천·안동 쪽으로 가다 59번 국도에 올라 산북을 지나서 좌회전해 직진하면 김용삼거리다. 여기서 우회전해 가좌리 쪽으로 직진하면 오른쪽에 ‘사불산 대승사’를 알리는 표지석이 나온다. 글·사진 =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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