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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陰陽)이란?

라이프(life)/명리학

by 굴재사람 2009. 3. 13.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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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적엔가, 인간이 농사를 막 시작하던 무렵 정도에 사람들은 해가 점차 길어졌다가 다시 짧아지며 그것이 반복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씨를 뿌리고 가꾸어서 더 많은 식량을 얻어내는 농사라고 하는 신기술은 어느 때가 되면 해가 다시 길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해의 길어짐과 짧아짐의 반복과 주기성(週期性)을 발견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고 인류에게 대단한 혜택을 안겨주었다.

인지(人智)가 발달하면서 사냥기술도 더 정교해졌지만 사냥은 다른 동물들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농사를 통해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인류가 진정으로 다른 동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로 도약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인류에게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게 해준 농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정보는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거두느냐 하는 것인데, 이는 다시 말해서 해가 길어지고 짧아지는 때에 관한 정보라 할 수 있다.

사실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이 때 발명된 것이다.

나날이 뜨고 지는 해를 통해 시간에 대한 어설픈 관념은 있었겠지만, 수많은 날들을 통해 더 큰 차원에서의 반복적인 시간, 그러니까 연(年)이라고 하는 것은 해의 길어짐과 짧아짐이 반복적이고도 주기적이라는 것을 확인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최초로 이 정보를 알아내고 관리했던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 샤먼(shaman)이라고 부르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샤먼은 그 시대의 첨단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농사를 통해 인간의 개체 수는 비약적인 증가를 보였을 것이니, 샤먼들은 시간과 연(年)에 대한 지식으로 존경과 부를 누렸을 것이다.

농경은 인간을 조직화시켰고 결국 원시국가를 탄생시켰다. 그 과정에서 무력이 뛰어난 자들과 샤먼들은 그 국가의 권력을 분점했을 것이다. 문화(文化)라고 부르는 것 역시 이 때 생겨났다.

한 해의 길이를 결정하고 달력을 만들며 농경의 시기를 알려주는 정보야말로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의 추상적인 학문이기도 하다. 그 학문을 우리는 역법(曆法)이라 부른다.

역법(曆法)은 결과적으로 해의 길이를 측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일정한 시간을 재는 데에는 물시계도 가능하지만 궁극적으로 해시계는 하루의 시각을 재는 것은 물론 일 년을 통한 해의 길어짐과 짧아짐을 측정하는 가장 좋은 도구인 것이다.

해가 하늘의 정남쪽에 오는 것을 남중(南中)이라 하고, 그 때를 정오(正午)라 한다.

정오에 해의 그림자를 재어 그 길이를 기록하고 그런 일을 매일 반복하다 보면 그 그림자 길이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니 그것으로서 계절의 변화와 함께 낡은 해가 가고 새 해가 왔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엄청난 기술을 발전시킬 때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음은 물론이다. 음양이란 개념도 그 과정에서 생겨났다.

  

음양을 소식(消息)이라고도 한다. 줄어들고 늘어난다는 뜻이니, 여기서는 해가 비치는 시간의 변화를 뜻한다. 바로 한 해의 순환을 말하는 것이다.

또 줄여서 어두운 것을 음(陰)이라 하고 밝은 것을 양(陽)이라 한다. 빛과 어둠이 바로 음양이다.

음양이란 개념은 앞서 말한 역법(曆法)의 발전과 궤를 함께 하는 것임을 말하다보니 서두가 길었다.

영향력이 큰 어휘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용도로 쓰이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되고 더 함축적으로 되어간다. 쉬운 예를 들면, '힘'이란 단어는 물리적인 힘에서부터 권력이라는 의미까지 모두 함축하고 있지 않은가.

 '음양'이란 어휘도 그런 과정을 밟았다.

음양이란 개념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물의 두 가지 측면 또는 서로 상반되는 사물간의 구분을 뜻하는 것으로 변화 발전되었다.

크고 작음(大小), 길고 짧음(長短), 높고 낮음(高低), 멀고 가까움(遠近), 나이 들고 어림(老小), 남자와 여자(男女) 등등의 구분이 모두 음양이다.

가령 그림에서도 음양을 구분할 수 있다. 그림 속에 여백이 많고 묘사된 부분이 적으면 음(陰)이 양(陽)보다 많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묵화, 그 중에서도 문인화(文人畵)가 그러한 데, 여백 즉 음(陰)을 많이 두고 양(陽)한 부분을 적게 함으로써 오히려 강조하는 기법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한 번 떠올려보라.

같은 수묵화라도 여백의 크기만이 아니라, 마른 먹이냐 젖은 먹이냐에 따라 정서가 다르고, 붓질의 장단(長短), 필세의 능숙과 고졸(古拙)에 따라 또 다르며 나아가서 표현된 주제에 따라 또 음양이 다르니 그를 통해 화가의 미묘한 정서를 표출하는 것이다.

반하여 서양화는 일반적으로 양(陽)이 승(勝)한 그림이라 하겠다.

이런 면에서 다른 문명권에도 음양과 아주 유사한 관념이 있으니 이른바 이원론(二元論)이라 하는 것이다.

이원론과 유사하지만 음양에는 다른 면도 있어 그 점이 음양을 특색 있게 해주고 있으니 바로 '구분의 상대성'이다.

음양은 어디까지나 무엇에 비하여 정해진다. 가령 밝은 색이 있어 양하다고 해도 더 밝은 색과 견주면 음이 되는 것이다.

생물은 무생물에 비해 양이지만, 같은 생물에도 동물과 식물이 있으니 이럴 경우 동물이 양이 되고 식물은 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물 하나만을 바라볼 경우 거기에 음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드시 무엇에 비겨서 음양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음양이 절대가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점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선악(善惡) 개념이 있다. 그런데 선과 악 역시 무언가를 또 다른 무엇에 비길 때 선과 악이 나뉘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쁜 자가 있어도 더 독하고 나쁜 자에 비기면 오히려 선하게 보인다. 착한 자가 있어도 더 어진 자 곁에 가면 악하게 보인다.

옳은 것이냐 틀린 것이냐의 문제도 그렇다. 사물을 바라보는 각도와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시비(是非)이다.

이처럼 선악(善惡)이나 시비(是非)란 것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데, 우리들은 자칫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혼란에 빠지곤 한다.

이렇듯 음양으로 사물과 세상을 보는 방식은 절대주의(絶對主義)의 오류(誤謬)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 세상과 스스로를 좀 더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음양이 상대적 구분이라는 점과 아울러 음양에는 두 가지의 또 다른 사고방식이 바탕에 놓여있다.

그 첫 번째는 순환적 사고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음양은 조화(調和)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첫 번째인 순환적 사고에 대해 얘기하겠다. 음양관(陰陽觀)-음양으로 사물과 세상을 보는 방법-자체가 역법의 발전과 궤를 함께 하기에 순환적 사고방식이 거기에 깔려있다.

쉽게 말해, 좋은 일이 있었으면 반대의 일도 당하게 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응달에 오래 있었으면 조만간 따뜻한 양지를 맞이할 것이며, 세상이 오래 태평했으면 난세(亂世)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예감케 한다. 이로써 우리는 스스로를 근신하고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의 변화가 일직선(一直線)이 아니라 굽었다 폈다 하며 이루어진다는 것을 음양적 사고방식은 말해주고 있다.

세상의 변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오무림과 펼침이 반복되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언제까지나 수축만 되거나 확장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근대 서구의 정신은 음양관의 이런 순환적 사고방식과 날카롭게 충돌하고 있다.

/김태규 명리학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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