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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한 사람 발소리 듣고 와인향 익는다

라이프(life)/술

by 굴재사람 2009. 1. 2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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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한 사람 발소리 듣고 와인향 익는다

 

 

와인은 흔히 천지인(天地人)의 합작품이라 한다. 빛나는 태양과 비, 따뜻하고 서늘한 기온 같은 하늘의 혜택을 입고 천차만별인 토양에서 지역마다 특색 있게 포도를 키워내는 땅, 그리고 포도를 심고 키우고 거두어서 모든 경험과 지혜를 동원하여 기술을 개발해 가며 정성껏 땀 흘려 술을 빚는 사람. 이 세 가지가 합쳐져 그윽하고 향기로운 와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와인을 만드는 지역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모두 최선을 다하고 국제시장에서 이기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어느 지역이라도 다른 토양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뛰어난 테루아는 있지만 이것은 와인을 만드는 나라라면 어느 곳에도 있다.

이런 땅과 하늘의 조건이 절대적인 경쟁의 전제조건이 되지 못한다고 할 때 결국 와인 시장을 결정짓는 것은 사람이다. 수천, 수만 종 와인이 서로 고지를 점하겠다고 치열한 국제 경쟁을 하는 전장에서 무엇보다 뛰어난 품질이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겠지만 와인의 기술이란 것이 반도체 기술처럼 초고속으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라면 결과적으로 중요하게 떠오르는 변수가 마케팅과 시장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고급 와인은 서민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엄청난 고가로 팔려나가지만 그 가격만큼 모두 `엄청난` 품질을 보증하느냐는 별개 문제다. 이런 유럽 슈퍼하이엔드 프리미엄 와인에는 역사 전통문화 전설 등 모든 보이지 않는 가치가 포함되어 있는 데다 포도 재배면적이 제한되어 있어 부유한 수요자는 계속 늘어나다 보니 바로 희소성까지 급격하게 부각되어 부르는 게 값이 되어 버린 면도 있다.

이처럼 오만하기까지 한 유럽 와인에 신대륙이 도전장을 던진 것이 1970~80년대고, 특히 칠레는 보르도와 같이 변덕이 심한 기후 대신 고르고 부드러운 기후로 빈티지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 경작과 포도가 자라는 동안 건조하고 따뜻한 날씨가 지속되다가 수확이 끝난 직후에 우기가 시작된다는 천혜를 누리고 있어 포도 품질이 뛰어나다. 칠레는 세계 6위 와인 수출국으로 성장했고 공격적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으로 정책적인 지원이 와인 산업을 뒷받침한다.

이제 칠레 와이너리들은 와인시장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과연 자신의 무엇을 경쟁력으로 내세울 것인가를 고민하고 포도 재배와 양조의 철학을 내세워 경쟁 업체들과 차별성을 강조하는 데 힘쓰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미래를 내다보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노력은 기술 개발, 품질 향상에 못지않게 스스로의 혁신적인 이미지 구축, 친환경적 의식 전환, 미래 지향적 비전 제시로 나타나고 있다.

`와인 오브 칠레(Wines of Chile)`와 주한 칠레대사관 상무관실, PROCHILE(칠레수출진흥청)의 협조로 떠난 칠레의 와이너리 투어 중 인상적이었던 와이너리 몇 곳을 소개한다.

◆ 콘차 이 토로…세계 Top3 와이너리…그 자체가 박물관

박물관으로 쓰이는 콘차 이 토로 창업자 건물
= 1883년 멜초 산티아고 데 콘차 부부가 세운 콘차 이 토로(Concha y Toro) 와이너리는 세계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대 와이너리 중 3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명실공히 칠레 최대 와인제조업체로 연간 1억병을 전 세계에 수출한다.

칠레 전국에 걸쳐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고, 본사는 수도 산티아고 근교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와이너리 자체가 박물관이자 시음장이자 관광명소로 하루에 관광객 1000여 명이 몰린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트리오, 카시에로 델 디아블로 등 대중 와인부터 돈 멜초, 아멜리아 등 100달러가 넘은 칠레 최고가 아이콘 와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생산한다.

카시에로 델 디아블로는 와인이 자꾸 없어져 저장고에 마귀가 나온다는 소문을 퍼뜨린 뒤부터 와인 도둑이 사라졌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이를 활용하여 지하실 저장고에 기괴한 음악과 마귀 실루엣을 비추는 등 관광객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프랑스 보르도 와인명가 필립 로칠드와 조인트벤처(국제 합작자본으로 설립한 기업)로 유명하며 칠레 최고가 와인 중 하나라는 알마비바는 포도밭이 산티아고 중심부에 있다. 그러나 외국 자본과 합작이라 그런지 이 포도원은 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 에라수리스…1870년 창업, 칠레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

에라수리스 와이너리
= 에라수리스(Errazuriz)는 콘차 이 토로에 이어 칠레 제2 와이너리이자 1870년에 창업한 최고(最古)의 보데가(양조장). 전국 단위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으며 창업 당시 지어진 양조장 건물이 지금도 에라수리스 와인 상표에 그려져 있다.

기술 혁신을 거듭해 칠레에서 최고급 와인을 주로 생산하는 와이너리다. 최상급 아이콘 와인으로 창업자 이름을 딴 돈 막시밀리아노, 1993년 개발한 시라즈 품종의 아이콘 와인 라 쿰브레(La Cumbre), 카르메세르 품종으로 만든 카이(KAI)는 100달러가 넘는 최고급 칠레 와인 대열에 당당히 서 있다.

아울러 칠레 와인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세냐(Sena)는 조인트벤처로 미국의 캘리포니아 로버트 몬다비와 프랑스 필립 로칠드가 합작해 만든 오퍼스 원(Opus 1)에 이어 속칭 오퍼스 투(Opus 2)로 역시 로버트 몬다비와 에라수리스의 합작으로 만든 걸작이다. 그러나 로버트 몬다비 지분을 사들여 이젠 순수한 칠레 자본이자 자랑스러운 고급 칠레 와인의 상징과 같은 존재로 우뚝 섰다.

◆ 코노 수르…거위 2000마리 길러 해충 잡는 `청정 와인`

= 포도밭을 보여줄 때는 대개 자가용이나 마차에 태워 안내한다. 그런데 코노 수르(Cono Sur) 와이너리에 도착하니 자전거를 건네준다.

이 회사 상표에도 자전거가 그려져 있다. 자전거야말로 이 와이너리가 지향하는 포도 재배, 와인 제조의 철학을 상징한다. 인공적인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자연과 청정`이다. 눈길을 끄는 것 중 하나가 새로 심은 묘목에 두꺼운 종이에 싼 마늘을 밑동에 풀로 묶어둔 독특한 모습이다. 모두가 자연 재료다.

부리토란 해충이 어린 포도 나뭇잎을 갉아먹으러 기어오르다 독한 마늘 냄새에 땅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이 해충을 잡아먹는 게 바로 거위고, 화학 구충제 대신 천적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청정을 유지한다. 해충을 잡아먹는 거위를 2000여 마리 기르는 것도 다른 와이너리와 차이 난다. 또 하나의 포도나무 천적은 붉은 거미인데 이 역시 천적인 흰 거미로 박멸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순수한 자연과 청정의 철학을 내세워 깨끗한 환경에서 재배한 순수한 포도 열매로 빚는 청정 와인이 이 와이너리의 경쟁력이다. 많은 코노 수르 제품 가운데 오시오(OCIO)는 이 와이너리가 자랑하는 아이콘 와인이다.

[이원복 덕성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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