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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과 인터넷

라이프(life)/풍수지리

by 굴재사람 2009. 1. 1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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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정감록과 인터넷

 

조선왕조를 괴롭혔던 모든 유언비어의 저수지는 '정감록(鄭鑑錄)'이었다.

주자학(朱子學)이 이씨 왕조를 지키는 정파(正派)의 용천검이었다면,

정감록은 이씨가 망하고 정씨 왕조를 고대했던 사파(邪派)의 장풍과 같은 것이었다.

용천검과 장풍의 한판 대결. 장풍은 모래바람을 일으킨다.

'정씨왕조설'에 노이로제가 걸린 조선왕실에서는 19세기 후반에 사파의 책동을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부득이 사파의 전매특허인 풍수도참을 역으로 동원했다.

정씨의 홈그라운드인 계룡산에 압정사(壓鄭寺)라고 하는 이름의 절을 세웠던 것이다.

사파의 장풍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정씨를 누르는 절'까지 세웠겠는가!

계룡산파들은 이 '압정사 프로젝트'를 추진한 장본인이 명성황후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정감록은 누가 언제 만들었단 말인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나는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백승종)에서 제기한 '서북지역 술사설'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황해도와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서북(西北)지역은 조선왕조 내내 천대를 받던 지역이다.

서북 인재는 벼슬길이 봉쇄되었으므로 주류사회로의 진입이 불가능하였다.

체제에 가장 불만이 많았던 이 지역의 술사(術士), 즉 유랑지식인 그룹에서

18세기 초반 무렵에 정감록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풍수도참의 온상이었던 서북에서 제조된 정감록이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남쪽으로 퍼졌다는 것이

이 책 저자의 주장이다.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반란사건은 서북사람의 소외감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상층 지도부는 대부분 풍수도참 전문가들이었고,

정감록 신봉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평양을 비롯한 서북지역에서 주자가례(朱子家禮)의 핵심인 제사(祭祀)를 거부하는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수백년간 누적되어왔던 지역차별과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는 서북인들에게 차별 없는 평등세상을 보여주는 천지개벽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정권을 흔드는 정감록은 다름 아닌 '인터넷'이다.

뚜렷한 벌이가 없는 백수계층이 전국적으로 300만 명을 넘는 상황이다.

과연 백수들의 장풍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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