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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 순환과 음양오행 (하)

라이프(life)/명리학

by 굴재사람 2008. 11. 18.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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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령(月令)이나 시칙(時則)은 그 달의 성격과 특성을 알리고 나아가서 군주가 그 달에 행해야 할 바를 밝힘으로써 일년 열 두 달을 통해 정치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의 스케쥴을 규정하고 있으니 그것은 일종의 정치일정 달력이기도 하다.
  
예기보다 더 뒤에 나온 회남자의 시칙(時則) 편에는 좀 더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가령 중추의 달에 춘령(春令)을 내리면 계절의 시의(時宜)와 맞지 않으므로 가을비가 내리지 아니하여 나중에 초목은 꽃을 피우지 아니하고, 나라 안에 큰 공황이 일어난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 하령(夏令)을 행하면 나라 안에 한발이 일어나고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 겨울잠에 들지를 못하며, 곡물이 다시 소생하는 기현상이 발생하다. 또 동령(冬令)을 내리면 풍재(風災)가 잦고, 우레가 치지 아니하며, 초목은 일찍 시들어 떨어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춘령이나 하령, 동령 등은 앞서 중추의 달에 행할 정치를 규정했듯이 봄이나 여름, 겨울에 행해야 하는 정치를 말한다.
  
예를 들면, 2월의 춘령은 만물이 약동하는 계절이므로 경범자를 사면하고, 질곡을 풀어주며, 태형(笞刑)을 행하지 않으며 재판을 하지 않고, 어린 아이들을 돌봐주며 길일을 택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지내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를 가을에 행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고대 농경사회는 본시 발전(發展)이나 개발(開發)이란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라의 군주나 위정자들의 정치 역시 어떤 발전이나 개발이라는 관념이 없었기에 사시사철, 계절의 순환에 따라 그 시의(時宜)에 맞는 적절한 일을 하는 것이 정치의 대강이었다.
  
결국 고대인들은 정치는 물론 모든 생활 전반이 우주의 순환과 함께 하는 것이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원한 우주의 순환과 주기에 따라 생활한다는 것, 이는 오늘날과 같이 발전이나 개발이 고정관념이 된 사회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개발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현대인들의 집착은 고대 사회에서는 없던 관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모든 국가는 경제성장률이란 개념을 채택하고 있다. 발전과 성장이 기본관념으로 정착되어 버린 것이다. 어느 해의 인플레이션 비율과 명목성장이 같다면 이는 전년도와 경제규모가 같다는 얘기인데, 이 정도면 대단한 불경기로 우리는 치부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도 “지속가능한 개발”이란 개념이 널리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끊임없는 개발이나 발전에 대한 강조는 결국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강박관념 또는 집착에 불과할 수도 있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개발이란 끊임없이 앞으로 달리지 않으면 넘어지는 자전거와 같은 오늘날의 체제가 지닌 문제점에 대한 나름의 타협이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후손들에게 물려줄 환경을 유지하고 보전하는 가운데, 가능한 개발의 수준이 어느 정도이냐를 생각해보자는 발상인 것이다.
  
  

다시 얘기하지만, 농경 사회는 우주의 순환과 함께 살아간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순환의 질서정연한 가장 상층부에는 천리(天理)가 있다고 동아시아인들은 생각했고 서양의 경우 신(神)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유럽과 이슬람 문명권에서는 신의 의지와 뜻을 살피는 수단으로 열심히 별자리의 운행을 살폈고, 동아시아 세계는 우주의 순환에서 도출된 음양오행의 원리에 입각하여 하늘의 이치를 알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서구인들은 어느 때인가에 이르러 창조주 하느님이 세상의 일에 그다지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신은 죽었다’라고 감히 겁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그 후,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서구인들은 새로운 세계를 보기 시작했고 새로운 세계관을 지니게 되었다. 그 새로운 세계관이란 종전과는 많이 다른 것으로서, ‘한계가 주어지지 않은 세계’였다. 어떤 일을 해도, 어떤 욕심을 부려도, 어떤 의지를 가져도 근본적으로 그것을 제약하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확산되기 시작했는데, 이를 ‘자유의지’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의 경우, 인격이나 감정을 지닌 하느님이나 상제(上帝)라는 관념은 주류 사조로 자리 잡지 못했다. 옥황상제라든가 어떤 일을 잘 못 했을 때, 그에 직접 간섭하여 응징을 내리는 존재는 일반 대중의 신앙 속에는 자리했지만, 고급의 철학 속에서는 결코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반면 하늘의 이치, 즉 천리(天理)라는 관념이 줄곧 있어왔다. 이에 따라 황제나 임금은 천리로부터 그 지위를 얻었다는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으며, 정치 역시 천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면 임금이 직접 책임을 지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고, 나라 안의 모든 잘못된 일은 그 임금이나 주인 된 자의 실덕(失德)이거나 불찰로 여겨졌다.
  
  

서구나 동아시아를 아울러서 우리가 이른바 근대 이전이라고 부르는 세계는 자연의 순환과 그 이치에 따라 사는 세상이었다. 따라서 근대란 결국 순환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겨울철에도 여름 과일을 먹을 수 있고, 자정이 넘은 야심한 시각에도 전등을 환히 켜놓고 낮처럼 행동할 수 있는 생활, 이역만리 먼 곳도 불과 열 몇 시간 만에 비행기로 날아갈 수 있는 세상, 근대라는 말의 동의어(同義語)라고 해도 좋은 과학기술은 우주의 순환이 부여한 각종 제약과 순응으로부터 인간들을 풀어놓고 말았다.
  
근대화(modernization)란 인간의 능력과 노력, 의지에 의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 어떠한 제약도 시간적으로 기술적으로 일시적인 한계에 불과하다는 대담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나 시공간을 언젠가는 완벽히 통제하고 주무를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준 것이다. 하지만 그 바람에 인간들은 크게 상실하게 된 것도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만족(滿足)이라 부르는 정서 상태이다.
  
만족이란 욕망이나 욕구가 달성한 상태에서 주어지는 일종의 정서적 포만상태이다. 그러나 제약이 없어져버린 우리 인간들은 이제 만족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흔히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만족의 지름길이라 하지만, 사실 근대 이후의 정신은 만족하기보다는 환경을 통제하고 뜯어고침으로써 마음에 드는 상태를 만들어내자는 정신이다.
  
이는 그러나 만족과는 거리가 멀다. 만족이란 결국 어느 선에서 욕구나 욕망을 자제할 때 주어지는 것이지, 욕구나 욕망에 제약이 없을 때 만족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근대 이후의 정신은 이리하여 만족을 상실해버렸다. 인간상실의 시대라 부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제하지 못하는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이윽고 더 큰 해방과 일탈을 요구함으로써 만족을 달성하려고 하고 있으니 필자는 이를 근대화의 비극이요 역설이라고 생각한다.
  
  

근대화 이후의 모든 사회적 사상이나 사조는 프랑스 시민혁명을 모태로 한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계몽주의 등이 모두 프랑스에서 나왔다. 반면, 자유주의라든가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사조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결과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을 하다보니, 이 두 흐름이 크게 다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양자 모두 제약 없음에 대한 갈망이라는 근대화의 정신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들이다.
  
19세기와 20세기는 이 두 흐름간의 갈등을 한 축으로 하고, 또 한편에는 서구의 지배에 대한 여타 세계의 각성과 도전을 또 다른 축으로 하여 변천해왔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주의 순환에 맞추어 살아가던 것을 잊어야 하는 것일까? 이제 인류는 과거 수 천 년 동안 이어오던 생활양식과 단절된 전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 것일까?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닫아버리기는 뭣 하지만, 아직은 우리가 새로운 세계로 진입했다고 단정하는 것도 다소 이르다고 생각된다.
  
근대의 정신, 그 어떤 것도 제약하지 못한다는 정신, 과학기술을 통해 모든 것을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다는 새로운 세계관이 당대를 살고 있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만, 인류의 긴 역사를 놓고 보면 지극히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은 순환에 대한 정교한 통찰이다. 비록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순환에 대한 인식을 많이 상실해버렸지만, 순환은 우주 도처에 존재한다.
  
크게는 은하계로부터 적게는 배수구로 물이 흘러나가는 모습에까지 작용하는 나선형 소용돌이 구조가 있는데 이 것이 바로 순환 구조인 것이다.
  
아울러서 여전히 우리의 삶에도 순환은 어김없이 작용하고 있다. 다소 일탈하긴 했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그 역시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고, 하루의 삶 속에도 순환은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가 순환이라는 것을 다소 잊고 지내고 있을 뿐, 순환이 없어져버린 것은 아니다.
  
우주와 자연은 일직선(一直線)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나선의 소용돌이를 만들면서 방향을 잡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때로는 전진하기도 하고 때로는 후퇴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순환적 운동을 통해 어디론가 방향타를 잡고 있는 것이다.
  
극한을 추구하는 삶이 한 때 현대인의 문화적 우상(icon)으로 비치기도 하겠지만, 실은 여전히 적당히 나아갔다가 적당히 물러서는 삶이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기(禮記)의 서두에 나오는 글을 인용하면서 맺고자 한다.
  

“오만한 마음이 자라도록 내버려두면 아니 되며, 욕심을 한껏 부려도 아니 되며, 뜻을 만족시키려고 해도 아니 되며, 즐거움을 끝까지 추구하는 것도 아니 된다.”
  
  오불가장(敖不可長), 욕불가종(欲不可從), 지불가만(志不可滿), 낙불가극(樂不可極)

 

- 김태규 명리학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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