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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 순환과 음양오행 (상)

라이프(life)/명리학

by 굴재사람 2008. 11. 18.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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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놓고 볼 때, 가장 위대한 발명이나 발견은 무엇이었을까?
  
전기나 컴퓨터의 발명을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현대를 살고 있기에 빠져들기 쉬운 하나의 편견에 불과하다. 전체 역사의 공정한 심판관이 있어서 대답을 내린다면, 아마도 언어의 사용과 순환(循環)에 대한 인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언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도구(道具)라 할 수 있고, 우주와 계절의 순환에 대한 발견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자연철학(自然哲學), 즉 과학이라 할 수 있다.
  

 

순환에 대해 애기하고자 한다. 순환이야말로 음양오행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순환이란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알아보자.
  
낮과 밤의 교차, 시간이 지나면서 온도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는 계절의 변화가 바로 순환이다.
  
과거 신석기 문명이 움틀 무렵 신앙과 숭배의 일반적인 대상은 바로 태양이었다. 당시 빙하기의 말기였기에 지금보다 기온이 낮았고 따라서 따뜻한 날씨는 생존의 근원이 되는 조건이었다.
  
낮과 밤이 교차된다는 것은 비교적 일찍 인지할 수 있었겠지만, 계절적 순환에 대해서는 인류의 지혜가 상당히 발전한 다음에야 명확히 알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들은 태양이야말로 기온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궁극의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런 태양이 어떨 때는 차가워지고 또 어떨 때는 뜨거워진다는 사실, 다시 말해 계절의 순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신앙이란 태양이 점차로 식어가기 시작하면(지금의 가을과 겨울), 태양이 다시 뜨거워지고 많은 열을 땅위에 내려쬐기만을 열심히 간구하고 빌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태양신앙이다.
  
태양신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흔적을 남겨두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이고 석가탄신일, 그리고 부활절이다. 크리스마스는 원래 동짓날이고 초파일이나 부활절은 해가 더 길어지는 춘분을 기준한 것이다. 이 모두 태양이 길어지기를 간구하던 우리 조상들의 기원과 신앙이 그 후의 고등종교에로 이어진 유흔들인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다시 일조량이 많아지면서 살기 좋아지는 것은 그들이 열심히 태양신에게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런 믿음은 인간의 지혜가 발전하면서 태양은 언제나 또 다시 길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태양이 줄어들고 길어지는 데에는 일종의 규칙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순환(循環)을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낮과 밤의 순환과 더불어 수십날 수백날을 주기(週期)로 하는 긴 순환, 즉 계절의 순환을 알게 된 것은 인류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으니 바로 농경(農耕)이었다.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식물을 길들여서 잘 관리하고 때로는 시간을 두고 그 성질을 개량하면 더 많은 식량을 만들어낼 수 있는 최첨단 기술을 익히게 되었던 것이다. 농경은 인구가 불어나느냐 마느냐를 결정짓는 엄청난 혁명적 사건이었다.
  
아울러 계절의 순환을 알게 되면서 인류는 시간(時間)이라는 추상적인 도구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상한 얘기 같지만 시간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체도 아니요, 그저 인간들이 순환을 인식하면서 만들어낸 하나의 추상적인 도구(道具)인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도구로서는 엄연히 존재하는 기이한 그 무엇인 것이다.
  
계절의 순환을 알게 되고 농경을 하면서 순환과 시간의 규칙성을 보다 엄밀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응용하는 것이 사회적 생산증대의 지름길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거두어들일 것인지에 대해 안다는 것은 계절적 순환의 규칙성을 잘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바로 역(曆), 즉 달력이며 역(曆)은 동시에 역(歷)과 통하니 고대 왕조에 있어 사관(史官)이란 역법을 제정, 유지하고 시간의 경과에 따른 왕조의 일들을 기록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고대 중국 왕조들은 나아가서 일년과 계절의 순환을 월별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월에 따라 왕이나 통치자가 해야 할 정치의 근본 대강까지도 엄밀하게 규율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유교의 핵심 경전인 예기(禮記)나 여씨춘추(呂氏春秋), 회남자(淮南子) 등에 기재된 월령(月令)이고 시칙(時則)이다.
  
월령(月令)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그 달에 행하는 임금의 명령을 말하는 것이고, 시칙(時則)이란 시에 따라 정해진 규율을 말하는 것이다.
  
  

마침 이제 며칠만 지나면 백로절이 되어 9월이 되니 예기(禮記)에 실린 9월의 월령을 잠깐 인용해본다.
  
“중추(仲秋)의 달은 북극성의 자루가 유(酉), 즉 정서(正西)를 향하고 있고, 저녁에는 견우성이 남중(南中)하고 아침에는 자휴성이 남중한다. 그 날은 경(庚)과 신(辛)에 해당되고, 제(帝)는 소호씨, 그 신(神)은 욕수, 그 벌레는 털이 달린 벌레, 그 소리는 상(商)음, 그 율(律)은 남려(南呂), 그 수는 아홉 9 수, 그 맛은 매운 맛(辛), 그 냄새는 날고기의 비린내, 제사하는 곳은 문(門), 제사 시에 바치는 음식은 간(肝)을 우선으로 한다.
  
빠른 바람이 불어오고, 기러기가 남으로 오며, 현조는 따뜻한 곳으로 돌아가며 뭇새는 겨울의 양식을 저축한다.
  
이 달에 (임금은) 노인을 봉양하는데 걸상과 지팡이를 주고 죽과 음식을 하사한다. 그리고 복장을 담당하는 관리에게 명하여 (겨울철) 의상을 구비하고 정제토록 한다.
  
이 달은 낮과 밤이 같아지고-이른바 추분(秋分)-천둥이 비로소 그 소리를 거두며, 칩충이 거주하는 곳의 구멍을 작게 만든다.
  
쌀쌀한 기운이 차츰 왕성해지고 양기(陽氣)는 날로 쇠하고 물이 고갈된다.
  
추분에 가서 자와 말, 되를 고르게 하고 저울을 평균되게 하여 근량을 바로 잡고, 말과 섬을 비교하여 바르게 정비한다.”
  
  

필자가 젊은 날, 예기나 회남자 등에 실린 이 글을 읽었을 때 실로 황당한 느낌이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다소 그럴 것 같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옛 문헌에 대한 조예가 좀 깊어지고 눈이 넓어지다 보니 월령이나 시칙이 고대의 대단히 중요한 정신과 사상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간단하게나마 설명해 본다.
  
앞부분은 중추월이 언제인가를 알리는 중요한 계절적 특징들을 말해주고 있다. 북두칠성의 자루가 저녁 무렵에 정서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 견우성과 자휴성이 남중한다는 것을 통해 누구나 계절을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일종의 자연 시계이고 달력인 것이다.
  
다음으로 중추월이 지닌 오행상의 특징을 말하고 있다. 재미난 점은 가을 제사에는 간(肝)을 우선적으로 바친다고 했는데 이는 간이 오행상 목(木)의 기운이고 계절의 기운은 금(金)이니 금이 목을 제물로서 즐기는 까닭이다. 금에 있어 목은 재(財)가 되어 식량이 되니 오행의 상극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 다음에 가서 ‘빠른 바람이......뭇새는 겨울 양식을 저장한다.’는 부분은 중추월에 눈에 띄는 자연 환경의 변화를 말한다.
  
그런 연후에 임금이 해야 할 일, 바로 정치를 규정하고 있다. 가을바람이 깊어가니 허약해지기 쉬운 노인들을 봉양하고 죽과 지팡이 등을 하사하여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고 이르고 있다.
  
또 겨울철 관리들의 의복을 법도에 맞도록 준비토록 한다. 추분이 되면,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것을 본받아 각종 도량형들을 다시 한 번 정비하여 속임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예기의 월령이나 회남자 등의 시칙편은 거의 대동소이한 내용인데, 왜 이런 글들이 고대의 중요한 서적들 속에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것일까?
  
예기는 유교의 교리와 사상을 담은 핵심 경전이고, 회남자는 사실상 도교의 소의 경전인데, 달에 따른 특징과 임금의 행할 바를 적은 글이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얘기이다.
  
그것은 인류가 농경 사회로 진입하여 생산이 급증하고 왕조의 물질적 기초가 마련되면서 모든 통치행위와 정치는 그 또한 계절적 순환과 함께 해야 한다는 사상을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월령이요 시칙이기 때문이다.
  
고대 동아시아 왕조에 있어 통치의 도(道)란 바로 계절적 순환과 함께 하는 것, 끊임없이 반복되는 우주적 순환과 함께 함으로써 이상적인 통치를 달성할 수 있다는 사상이 이 글들 속에 배어있는 것이다.
  
   

- 김태규 명리학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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