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만 년 전의 시간대였을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은 태양이 식어들기도 하고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혹 태양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땅 위는 너무나도 추워져서 마침내 모든 생명들이 살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들은 사람들을 모아 엄숙하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그런 바람에 부응해서인지 태양은 식었가다가도 어느 날부터인가는 다시 살아나 햇빛이 많아졌고 들에는 꽃과 풀이 피어나고 살기 좋은 시간들로 변했고 다시 어느 때가 되면 태양은 삭아들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열심히 정성을 모아 태양이 살아나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또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땅에 작물을 심어 식량을 만드는 농경 사회로 접어들었다. 대략 5천년 전쯤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농경이란 결국 태양으로부터의 온기(溫氣)를 동력으로 하는 것이었기에 해가 짧아져도 다시 살아나야 하며, 그것도 규칙적으로 반복되어야만 농경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깊숙이 새기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기도를 했고 수확을 하고 나면 태양에 대한 감사 기도를 잊지 않았다. 이것이 오늘날 추석과 추수감사절의 기원이다. 제사를 집전하던 사람들은 당연히 그 사회의 최고 권력층이었고 모든 권력과 권위는 결국 태양으로부터 온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태양과 직접 통한다는 것을 통해 그 권력과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떨 때는 태양이 어떤 사악한 힘에 의해 먹히는 대단한 변고도 발생했는데, 지금 우리가 일식(日蝕)이라 부르는 이 현상은 그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유발했다. 사회내의 불온한 사람들이 이상한 짓을 했든지 아니면 통치자가 부덕(不德)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그에 따른 조치를 취했으니 일종의 정화(淨化)작업이었다.
지금도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났을 때 그리고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지도층 인사가 몸가짐을 단정히 하지 않으면 엄청난 비난에 직면하기도 하는데 이 모두 그 연고가 대단히 오랜 것이다.
이처럼 태양은 인간 사회에 있어 절대적인 존재였기에 태양이 화가 나거나 삐치는 것은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고 믿어졌다. 태양에 대한 숭배와 경외는 이처럼 엄청난 것이었고, 오늘날 모든 종교에서 받드는 신이나 하느님, 또는 절대자는 그 근원이 태양이었다. 즉 태양이 신의 원초적 모델이었다.
우리의 설화나 전설에서 시조(始祖)가 빛나는 알에서 태어나는데 이 역시 빛나는 알은 태양의 상징이고 다른 문명권 역시 마찬가지이다. 태양은 하늘을 나는 새로서 상징되었고 그 바람에 아폴론이나 불사조, 그리고 우리의 삼족오가 등장한 것이다. 이집트의 신도 역시 태양신인 '라'였으며 모든 인류는 태양신을 숭배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대단히 예리한 눈을 지닌 사람이 말하기를 '태양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길어지고 때가 되면 줄어든다.'고 말했다. 이는 거의 혁명적 발상이었다. 즉 자동으로 해가 길어지고 줄어든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동안 태양을 빙자하여 권위와 권력을 누리던 계층의 정당성은 부인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식량을 만드는 농사는 태양으로부터 힘을 가져다 쓰는 것이고, 이는 사제와 권력층이 태양과 통하고 친한 바람에 사회 전체가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사회에 있어 엄청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예리한 눈의 사람은 비록 처음에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사회 권력의 재편을 불러오는 일로 비화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구가 돈다.'라고 말했던 갈릴레오처럼 태양이 자동으로 소장(消長)을 거듭하는 것은 점차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자 권력층은 또 다시 그에 따라 전략을 수정했다. 이제는 태양과 통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언제 길어지고 언제 줄어드는지를 알려주는 정보제공을 주요 권력 기반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정보는 농사에 있어 언제 파종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정보, 바로 그 정보는 달력(calendar)이었다. 이를 좀 유식한 말로 관상수시(觀象授時), 풀어서 말하면 천체의 운행-주로 태양의 소장-하는 모습을 보아 때를 받는 것, 즉 달력을 편집하는 일은 고대 국가에 있어 왕권만이 지닐 수 있었던 금단의 하이테크였고 권력유지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달력을 만든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 이유는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360일도 아니고 나아가서 365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은 365.2425일로 기준을 잡고 있다.
그러니 달력을 만들어 사용하다 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절로 오차가 발생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과거에 새 왕조가 들어서면 빼놓지 않는 일이 낡은 달력을 바꾸는 일이었다. 좀 더 나은 달력을 앞세워 과거 왕조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새 왕조를 정당시했던 것이다. 이런 습관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전해져온다.
정권이 바뀌면 언제나 전 정권을 씹어버리고 새 정권의 당위성과 참신함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전 정권의 공적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해버리는 폐단이 생기게 된다. 정권과 통치의 연속성보다는 단절이 두드러지는 것도 이런 관행 때문이다.
아무튼 태양이 자동적으로 어느 때가 되면 길어지고 반대로 줄어든다는 것을 인지한 사람들은 태양의 순환과 반복을 통해 세상이 순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일러 음양(陰陽)이라 이름 매겼다.
해가 길어지면 따듯한 기운이 점차 넘쳐나니 이를 양(陽)이라 하고 그 기운을 양기(陽氣)라 했으며 반대를 음(陰)이라 하고 또 음기(陰氣)라 했다.
결국 음양이란 태양의 순환과 성쇠, 소장에 대한 철학적 통찰인 것이다. 또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을 음양관(陰陽觀)이라 한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순환과 소장을 음양이라 할 때, 그것은 동아시아 세계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관념일 수 있는 것이고 단지 부르기만 우리는 음양이라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음양관은 오늘날 서구나 다른 문명세계에 알려지기를 동아시아 특유의 사상이며, 동아시아 사람들은 만물에 음양이 깃들어있는 것으로 믿는다고 이해하면서 마치 음양을 고대 원시신앙인 애니미즘(animism)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실로 왜곡이 심한 것이다.
음양관은 결코 신비하거나 이상한 사상이 아니며, 대단히 보편적이고 알기 쉬운 것을 마치 동양의 한 신비주의 정도로 여겨지고 있으니 한심한 것이다. 또 이를 응용하여 운명을 본다는 사람들이 해괴한 무슨 살(殺)-원진살, 백호살 등등 살도 정말 많다-이라는 것을 만들어 한 수 더 겁을 주고 있으니 더더욱 한탄스럽다 하겠다.
김태규 / 명리학 연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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