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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글모음(writings)/좋은 시

by 굴재사람 2008. 5. 4.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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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 원 태 연 -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아침에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으며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걸 알았습니다.

참으로 따뜻하고 행복합니다.

언젠가부터 저는 행복이 TV 드라마나 CF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거울을 통해서 보이는 제 눈동자에서도 행복이 보인답니다.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무의식중에 눈에 띄는 모든 것에 그 사람의 의미를 갖다 붙이고

무시하고 지나치던 유치한 무엇들에게 '예전에 그렇게 생각해서 미안해' 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좋은 일들만 생길 수가 있는지,

그렇게 늦게 오던 버스도 어느새 내 앞에 와 어서 집에 가 전화를 기다리라는 듯 나를 기다려 주고

함께 보고 느끼라는 듯 감미로운 사랑 얘기를 테마로 한 영화들이 속속 개봉되고,

읽어보고 따라 하라는 듯 좋은 소설이나 시집들이 눈에 띄고 있습니다.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주도, 그렇다고 그렇게 뜸하게도 만나지 않습니다.

매우 적당히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는 중입니다.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손을 잡는 것으로 만족하고,

조금 더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다음 약속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며 만나고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서로의 왼쪽과 오른쪽 어깨가 똑같이 젖을 정도로 다정하게

하나의 우산으로 비를 피하고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그의 생일이 찾아옵니다.

그의 생일날 무슨 선물을 건네줄까 고민하는 내 모습이 참 예뻐 보입니다.

'그에게 어울릴 만한 향의 로션이나 스킨이 무엇일까? 아니면 어떤 색깔의 난방이 그에게 어울릴까?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언제나 나를 떠올릴 수 있게 메모와 지갑을 겸할 수 있는 다이어리 수첩을 사줘 볼까?'

하며 이런 저런 고민을 하는 내 모습이 그렇게도 행복하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아침에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으며 내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을 때 문득문득 불안해지고는 합니다.

아닐 겁니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그 느낌을 불안하다 따위의 작은 감정의 기복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심장이 찢어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면 안 되는데 또 그렇게 되면 안되는데,

버스가 너무 빨리 와 어쩔 수 없이 일찍 들어간 집에서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

전화기만 만지작만지작 쳐다보고 있으면 안되는데,

감미로운 사랑 얘기를 테마로 한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게 되면 안 되는데,

읽을 만할 거라고 선물 받은 책 밤새도록 뒤적이며 울고 또 울게 되면 안 되는데.

어쩌면 그래서 그렇게 자주도, 그렇다고 그렇게 뜸하게도 아닌 적당히 만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입을 맞추고 싶다가도 손만 잡고 말아버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일 선물 하나 고르는 데 몇 날을 고민하는 이유는 이번에 또 잘못되더라도

기억 속에 안 남을 선물을 고르려 노력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번에 또 그렇게 되면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인가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또 생기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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