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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현 다산마을

라이프(life)/레져

by 굴재사람 2016. 6. 7.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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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현 다산마을(馬峴 茶山~, 마재)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관광지이다. 능내역 뒤쪽의 북한강변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로서 다산 유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용의 생가와 묘소가 있는 곳이다.

 

다산 유적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나란히 서 있는 유물관과 문화관을 만난다. 유물관에는 다산의 영정 및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다산의 실학사상이 담긴 저서와 집필기록, 산수화 등을 비롯해 거중기녹로 등 그가 만들었던 역사적인 물건들까지 재현해 놓았을 뿐 아니라, 다산초당, 천일각 등 그가 유배살이 하던 곳을 섬세한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해 두었다. 또한 다산 문화관에서는 강당에서 다산 영상물 및 교육자료를 상영하며, 다산학 무료강좌와 최첨단 자료를 이용하여 다산에 관한 자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유물관과 문학관을 나서면 뒤로 널찍한 광장을 사이에 두고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이 눈에 들어온다. 단아한 목조건물 여유당은 자료에 의해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놓은 서른세칸의 전통 양반집이다. 큰 나무 그늘과 나즈막하고 단아한 담장이 양반의 울타리를 넘어 아랫사람들을 허물없이 대했던 다산의 성품을 보여주듯 편하게 와 닿는다. 여유당 안은 무척이나 깨끗하고 검소하다. 규모도 작고 주변이 화려하지도 않다.

다산마을은 팔당호와 인접해 경치가 아름답다. 호숫가로 나가면 밤나무숲과 운동장이 있고, 강변을 따라 걷는 자갈길이 있고 일교차가 큰 가을 아침에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물안개로 장관을 이룬다.

생가와 북한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생가 뒤쪽의 나즈막한 산허리에 그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묘지 초입에 높이 약 2.5m, 폭 1m 정도의 다산을 기리는 비석이 있고 뒷편에 다산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묘지에서는 아래로 북한강과 건너편의 분원까지 한눈에 조망된다. 묘소에서 좌측의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선생을 추모하여 세워진 문도사라는 사당이 나타난다. 그곳은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유기농으로 재배하는 딸기농장이 있으며 이 곳에서 수확 체험도 할 수 있다.[1]

다산 유적지 앞에는 카페와 식당이 여럿있다. 카페와 식당들 사이의 좁은 길 안으로 들어가면 북한강변에 닿는다. 강변에는 넓은 광장과 간이매점이 있다. 예전에는 이곳이 엠티(MT) 장소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조금 시들한 편이다. 그럼에도 주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야유회를 즐긴다.

 

 

경기도 남양주시 두물머리 남쪽에 있는 마현(馬峴, 또는 마재) 마을은 정약용이 나고 묻힌 곳이다. 해배(解配) 후 그는 여유당(與猶堂)에서 지내며 죽을 때까지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다산은 ‘18’이란 숫자와 인연이 깊은 것 같다. 정조를 처음 상면하고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관직에 있던 세월이 18년, 강진에서의 유배 기간이 18년이었다. 강진 초당에서 지내며 길러낸 제자 또한 18명이었다. 그리고 고향에서 18년간 남은 인생을 보냈다.

1818년 8월 15일 고향 마현으로 돌아온 다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뛰어난 학자도 어쩔 수 없는 가난이었다. 다산은 이런 상황에 대해 “먹고 살 대책은 전혀 없고/ 글 쓰는 방에는 짧은 등잔대 하나/ 남모를 근심으로 밤잠은 오지 않고/ 어찌하면 여생을 탈 없이 마치리요”라고 시로 읊었다.

오래도록 유배 생활을 했던 남도의 바닷가 마을이 싫었을 만도 하지만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그는 다산초당을 궁금해했다.

한 번은 강진에서 마현 마을까지 천리가 넘는 길을 걸어온 제자 윤종익과 윤종진 형제에게 “금년에 동암을 이었느냐? 붉은 복숭아나무는 말라죽지 않았느냐? 연못가에 쌓은 돌은 무너지지 않았느냐? 못의 붕어 두 마리는 더 많이 컸느냐? 백련사 가는 길가에 심은 동백꽃은 모두 잘 피고 자랐느냐? 올 때 이른 차는 따다 말리고 왔느냐?”고 물으며 초당의 근황을 궁금해했다. 초당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물음이었다.

마현 마을은 앞으로 한강이 휘도는 곳에 자리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지척이다. 그러나 강물은 폭이 넓어 그다지 휘도는 듯 보이지 않는다. 다산은 강진에서 지낼 때 바다를 바라보는 귤동마을의 지형이 고향 산천과 비슷해 초당 뒤편 언덕에 올라 가족 생각에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고 한다.

정약용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조정이 시끄럽던 1762년 생원시에 합격했지만 관직을 포기한 부친 정재원(丁載遠)이 마현 마을로 내려온 지 24일 만에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갓 태어난 아들이 벼슬보다 농사를 지으며 행복하게 살라는 뜻에서 ‘귀농’(歸農)이란 아명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정약용은 부친의 바람과는 반대로 녹을 받으며 생활했고 18년간이나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인생의 아이러니인지 그는 강진으로 유배된 후 초당 옆에 밭을 가꾸며 귀농 아닌 귀농을 하기도 했다.

여유당은 다산의 당호(堂號)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온 말로, “신중하기(與)는 겨울에 내를 건너는 듯하고, 삼가기(猶)는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는 뜻이다.

다산은 여유당기(與猶堂記)에서 “이 두 마디의 말(여유)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들어와 뼈를 깎는 듯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며 당호를 ‘여유’로 쓴 이유를 설명했다.

‘용기가 있지만 지모가 없고, 착하지만 선택할지 모르고,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그만두지 못한다’고 했던 스스로의 약점을 이렇게나마 극복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헐뜯는 극도의 정쟁에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현재 다산의 고향 마을은 ‘다산유적지’로 불린다. 유적지에는 생가인 여유당을 비롯해 다산과 부인 홍씨의 합장묘, 다산문화관, 실학박물관 등이 있다. 지금의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됐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이다. 다산은 집 앞으로 강이 흐르고 뒤에는 낮은 언덕이 있어 ‘수각’(水閣)이라고도 불렀다.

여유당 뒤편 언덕에는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다산이 사랑하던 아내와 함께 긴 잠에 빠져 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후 다산은 미완으로 남아 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고 ‘흠흠신서’와 ‘아언각비’ 등을 저술했다.

회갑을 맞이해서는 파란의 세월을 회고하며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었다. 그는 묘지명에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사서(四書) 육경(六經)을 안다’라고 했으나/ 그 행할 것을 생각해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라고 했다.

결혼한 지 60주년이 되던 날, 다산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3일 전 미리 써 두었던 회혼시는 최후의 유작이 됐다.

“육십년 세월 잠깐 사이 흘러갔네/ 복숭아꽃 곱게 피던 봄철 신혼 같구나/ 생이별이나 사별은 모두 늙음을 재촉게 하는 것/ 슬픈 세월 짧았고 기쁜 세월 긴 것은/ 임금의 은혜로다(중략)…헤어졌다 다시 만난 것은 우리들의 참모습/ 바가지 두 쪽이나 자손에게 남겨 줌세”

다산문화관과 기념관은 정약용의 업적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문화관에는 다산이 설계한 배다리를 이용해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모습을 담은 능행도와 다산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실학을 배울 수 있고, 기념관에는 다산의 서한과 서책 사본, 축소 제작된 거중기(擧重機)와 녹로() 등이 전시돼 있다.

다산유적지 남쪽 강변으로는 여름이면 연꽃이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리는 생태공원이 조성돼 있어 한가롭게 산책을 즐기기 좋다.

 

 

남한강 자전거길과 함께 새로이 탄생한 능내역은 자전거 여행자들의 좋은 휴식처가 돼주고 있다. 남한강 자전거길이 자전거 이용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바로 능내역 때문이기도 하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였다.

그런 정취를 좇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선철도 시절의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남한강변을 따라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있다.

능내역(陵內驛)은 남한강 자전거길 사이에 위치한 철도역으로, 중앙선 열차의 신호장이었다. 신호장(信號場)이란 단선 철도 시절, 효율적인 열차운행을 역과 역 사이에 교행이나 대피를 할 수 있는 선로와 신호장치를 설치한 장소를 말한다.

1956년 남양주 중앙선의 간이역으로 시작하여 2008년 폐역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애환, 그리움을 기차에 실었던 공간이다. 2008년 이후로 기차가 다니지 않게 되었지만, 기차가 멈추고 오히려 더 이름난 역이 됐다.

현재 능내역사는 리모델링되어 관광용 및 갤러리, 쉼터로 사용 중이다. 역 앞을 지나는 철로는 폐쇄되었다가 보행로 및 자전거도로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길이 되었다. 흉가처럼 방치되거나, 문화재로 지정만 해놓고 굳게 잠가 둔 다른 폐역과 달리 능내역엔 늘 사람들 소리가 왁자하다.

더불어 역내에 있는 갤러리는 옛 철로구간인 능내역의 역사와 추억을 담은 공간을 조성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고 있다. 제1전시관인 추억관에는 폐역되기 전 사용했던 열차시간표와 운임표를 다시 설치하는 등 능내역 대합실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 능내역의 지난 세월을 그대로 재현했다.

제2전시관인 행복관에는 능내역 관련 기록과 사진, 영상이 전시되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특히 40~50년 전의 주민들의 사진으로 재구성된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통학생, 동네 주민, 촌로 등 지난 세월 능내역을 배경으로 찍은 수많은 사람의 사진이 걸려 있는 '추억의 사진 전시장'인 셈이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금세 훈훈해진다. 역 담벼락 앞에 전시해 놓은 빛바랜 사진과 나무 의자들도 잔잔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능내역 앞마을 능내리에 있는 다산유적지도 들러볼 만하다. 능내역에서 남한강 쪽으로 10분 가량 자전거 페달을 밞으면 다산 정약용 선생이 태어난 마을에 도착한다.

다산은 능내역에서 1km 떨어진 마현리(馬峴里)에서 태어났고, 병조참의 등 요직을 거쳐 승승장구 하다가 정조 임금이 승하하자 전남 강진에 귀양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노년에 귀향해 마현 마을(지금의 능내리)에서 눈을 감았다. 다산은 조선을 대표하는 실학자로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화에 연루돼 전남 강진 다산초당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한 인물이다.

다산 생가가 있던 다산유적지에는 복원한 생가 '여유당'과 소나무가 병풍처럼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부부 합장묘를 비롯해 기념관, 사당, 실학박물관 등이 들어서 있다. 다산유적지 부근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청정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선현(先賢)의 발자취를 돌이켜볼 수 있는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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