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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산에선 홍싯빛 메타 잎이 하늘로 내린다

글모음(writings)/꽃과 나무

by 굴재사람 2015. 12. 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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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의 길 위에서] 장태산에선 홍싯빛 메타 잎이 하늘로 내린다

숲은 수줍게 낯을 붉혔다. 발그레한 만추(晩秋)로 물들었다. 울긋불긋 달뜬 성추(盛秋) 단풍과는 사뭇 다르다. 따스하고 차분하다. 키 30m 가까운 침엽수들이 운무(雲霧)를 이고 섰다. 메타세쿼이아다. 나무들 허리춤에 난 데크 길이 하늘길인 양 메타세쿼이아 숲 사이를 간다. 이슬비에 젖어 빛나는 길을 색색 우산 받쳐든 사람들이 걷는다.

단풍 다 스러진 늦가을, 또 다른 단풍이 시작했다. 지난 주말 종일 실비 뿌린 날 그 늦단풍을 만나러 갔다. 대전 장태산휴양림에 들자 아침 아홉 시가 채 안 됐다. 들머리부터 거대한 '메타'가 줄지어 섰다. 주차장도 홍싯빛 메타 단풍과 희부연 안개비 는개가 에워쌌다. 세우(細雨)가 소리를 빨아들여 사위가 고요하다. 이따금 새소리만 맑게 울린다. 사람들이 차에서 내리며 탄성을 터뜨린다.

안내소에서 300m 메타 길 지나 후문 쪽부터 간다. 메타 숲속에 15m 철기둥을 세우고 폭 2m 나무 데크 길을 얹었다. 이리저리 휘어 550m를 뻗은 고가 산책로다. 그 길 걸으며 메타를 눈앞에 본다. 빗살 같은 잎을 만진다. 쌉싸래한 가을 내음을 맡는다. 길 끝에 철골로 세운 높이 27m 전망대 '스카이 타워'가 있다. 나선형 데크를 몇 바퀴 돌아 오르면 메타 숲과 데크 길, 장태산까지 한눈에 든다. 와서 보지 않으면 모르게 각별한 가을 풍경이다.

하늘에서 내려와 산림욕장으로 들어간다. 계곡가 메타들이 오연(傲然)한 직선으로 솟았다. 꼬장꼬장하게 하늘을 찌른다. 제일 높은 메타가 37m다. 발치 평상이며 의자를 떨어진 메타 바늘잎이 덮었다. 지난 추석 처음 왔을 때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뒹굴던 곳이다. 한 평상에 젖먹이가 엎드려 겨우 목만 가누고 있었다. 어린 아들의 머리를 젊은 아버지가 쓰다듬었다. 무한한 사랑과 행복이 아버지 눈길과 얼굴에 넘쳤다. 모든 부모에게 저런 시절이 있었다. 그때 아이가 준 기쁨을 오래도록 되새김하며 산다. 빈 가을 숲에서 그 아기와 아빠를 다시 떠올렸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장태산휴양림은 쉰 살 넘은 메타 1만 그루를 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메타 숲이다. 독림가(篤林家) 임창봉이 1972년부터 82㏊ 숲을 가꾸면서 미국에서 사와 심었다. 그는 건설업으로 돈을 벌었지만 천박한 세태에 신물을 내고 나무를 동반자 삼았다. 그의 숲은 1991년 사유림으로는 처음 자연휴양림으로 지정됐다. 그는 200억원을 숲에 들이고 2002년 세상을 떴다. 이제는 대전시가 시민의 숲으로 꾸리고 있다.

메타는 침엽수여서 흔히 상록수려니 하지만 잎 나고 지는 낙엽수다. 연두 새잎이 아기 손처럼 내미는 봄, 진초록으로 우거진 여름, 눈 내린 겨울…. 철 따라 그림을 펼쳐놓는다. 그중 으뜸이 11월 하순 스산한 초겨울 바람에 연홍 잎이 비 내리듯 우수수 날릴 때다. 쓸쓸한 비추(悲秋)의 절정이다.

이즈음 메타 풍경이 궁금했던 곳이 하나 더 있다. 이름난 전남 담양 메타 길은 사철 두루 가 봤기에 나주로 차를 몰았다. 몇 년 전 찬란한 초봄에 매혹됐던 전남 산림자원연구소 메타 길이다. 정문부터 곧게 뻗은 길 400m가 연구소 건물을 아스라한 소실점으로 맺는다. 마흔다섯 살 담양 메타보다 서너 살 터울밖에 지지 않아 거목의 풍모를 뽐낸다.

이 길은 차를 막은 담양 길 1.8㎞보다는 짧다. 하지만 한 해 120만명이 찾는 담양 길에 없는 게 있다. 호젓함, 고요함이다. 인적 끊겨 텅 빌 때가 많아 사진가들이 삼각대 세워놓고 한참을 기다린다. 이 길에 들어서면 누구나 목소리를 낮춘다. 묵묵히 천천히 걷는다.

중년 부부가 중3쯤 돼 보이는 딸을 데리고 왔다. 딸이 멈춰 섰다. 신발 안에 뭐가 들어간 모양이다. 아버지가 한 무릎을 꿇고 앉아 딸 신발과 양말을 벗긴다. 탈탈 털어내곤 얌전히 신긴다. 엄마는 팔짱 끼고 서서 보기만 한다. '딸 바보' 아버지라더니 저러다 어떻게 시집보내려는지 모르겠다. 이 길에선 찡그린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우중충한 날도 보석처럼 밝히는 길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전북 진안 모래재를 넘었다. 구절양장 잿길에 안개가 자욱해 겁이 날 지경이다. 오후 다섯 시가 밤 여덟 시처럼 컴컴하다. 잿마루 터널부터 3㎞ 내리막을 가면 부귀면 메타 길이다. 장태산, 담양, 나주와 달리 차가 오간다. 그래서 사진가들이 더 좋아한다. 그렇다고 이런 날씨, 이런 시간에 누가 있을까 싶었다. 웬걸 중년 남녀 사진가들이 삼각대 늘어놓고 진을 쳤다. 메타 길 사이로 내려올 버스를 기다린다.

15분마다 온다는 버스는 메타 단풍처럼 붉은 칠을 했다. 무주·진안·장수를 다니면서 버스 앞에 '행복 무진장'이라고 큼직하게 썼다. 이윽고 버스가 오자 셔터 소리가 콩 볶듯 한다. '부귀(富貴)'와 '행복'이 '무진장'한 메타 길과 열혈 사진 애호가들에 슬며시 미소가 솟았다.

장태산만 다녀오려던 메타 나들이가 길어져 하루 새 750㎞를 뛰었다.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머리는 맑았다. 한가을에도 시들고 메마른 단풍뿐이라 푸석거리던 마음속 먼지가 씻겼다. 메타 낙엽 비에 촉촉이 젖었다. 메타세쿼이아 늦단풍은 적어도 열흘은 더 갈 것 같다. 비 흩뿌리고 바람 부는 날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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