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지난 25년 동안 서울 종로1가 교보생명 건물에 걸려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온 이른바 '광화문 글판' 69개 중 가장
사랑받은 문구에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 꼽혔다.
교보생명은 블로그를 통해 '내 마음을 울린 글판'을 꼽아달라는 설문을 진행한 결과
2012년 봄에 3개월 동안 걸렸던 '풀꽃'이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고 14일 전했다. 한 설문 참가자는 '풀꽃'을 보았던 때에 대해 "가족
몰래 8년 동안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광화문을 지나는 버스 안에서 글판을 보고 나를 기다리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나태주 시인은 1945년생 해방둥이로, 1973년 첫 시집 '대숲 아래서' 이래 거의 매년 시집 한 권씩을
출간한 다산(多産)의 시인. 충남 서천 출신으로 지역에서 활동하며 마음의 꽃다발 같은 감성적인 문장으로 오랜 사랑을 받아
왔다.
2등은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는 정현종(76) 시인의 '방문객'이었다.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2005년 정년퇴임한 정 시인은, 물질화된 사회 속에서 매몰되어가는 인간의 영혼과 그 외로움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시로 이름났다.'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시 '섬'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300여명이 참여한 이번 설문에서 3위에 오른 문구는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장석주 '대추 한 알'),
4위는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정호승 '풍경 달다'),
5위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도종환 시인 '흔들리며 피는 꽃')였다.
'광화문
글판'은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가 제안해 1991년 교보생명 건물에 처음 걸렸다. 가로 20m, 세로 8m인 글판의 문구는 1년에 4번,
계절마다 바뀐다. 주로 문인들로 구성된 '광화문 글판 문안 선정 위원회'가 글판에 적을 문구를 선정한다.
조선일보 / 김신영
기자
입력 : 2015.10.15 01:58
[만물상] 광화문 글판 - 외국인들도 부러워하는, 25년 된 광화문의 '문화
상징물'
도심의 명물 반열에 오른 광화문 글판이 첫선을 보인 지 25년 됐다. 제법 세월의
더께가 쌓였다. 해외에 나가 10~20년을 산 동포가 서울 하면 떠올리는 표지로 광화문 글판이 첫손 꼽힌다.
글판은 석 달에 한
번 계절 갈이 하듯 교보생명 빌딩 외벽에 시구를 바꿔 거는데 추억을 되살리는 역할도 하는 모양이다. 교보생명이 '글판 25년'을 기념하는 뜻을
기려 옛 작품 예순아홉을 놓고 설문조사를 했다. 1위가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다.
▶글판에 전문(全文)을 새길 만큼 시가 짧다.
석 줄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첫눈에 반하지 않으면 사랑도 아니라는 세태를
나무라듯 자세히 오래 들여다보라고 타이른다. 결구가 절창이다. 그렇게 사랑한 사람이 바로 너이고 또 나일 수 있다니 뭉클해진다. 한 설문
참가자는 몰래 회사에 사표를 내고 8년을 살다 버스 안에서 이 시를 보고 "가족을 생각하며 많이 울었다"고 했다.
▶글판을 만들어 벽에 거는 일은 교보생명이 맡지만 시구를 뽑는 일은 대산문화재단에서 한다. 문학 담당 기자 때
4년 선정위원을 맡으면서 사뭇 떨리는 기쁨을 맛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문인과 재단 관계자 일곱 위원이 수십 편 후보작을 놓고 토론도 벌이고
투표도 한다. 마지막 후보작을 줄여 가느라 투표를 세 번씩 했다. 글판 크기나 시절 분위기와 조금 안 맞을 경우엔 시인 허락을 받아 몇 자
고치기도 한다. 그렇게 뽑은 글판을 사람들이 감탄하며 올려다볼 때 흐뭇했다.
▶설문조사에서 2위는 정현종의 '방문객', 3위가
장석주의 '대추 한 알'이다. 그러나 순위는 쓸데없다. 누구에게나 제 마음을 울리는 시는 따로 있다. 어떤 고위 공직자는 광화문 글판에서 고은의
'낯선 곳'을 읽었다.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 감동을 받은 이 사람은 곧바로 공무원을 그만두고 평소
꿈꾸던 사업을 시작했다. 이렇듯 글판은 갓 제대한 청년을, 큰 실패를 겪고 실의에 빠진 가장을 오늘도 안아준다.
▶광화문에는 하루
오가는 사람이 100만 명, 차가 25만 대쯤 된다. 열에 한 명만 글판을 봐도 10만 명이다. 환경재단이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을
선정하면서 처음으로 사람 아닌 이 글판을 뽑은 게 2007년이다. 외국 문인들도 부러워하는 문화 상징물이다. 근래 다른 공기관과 기업 건물도
시를 내거는 일이 많다. 화장실 안쪽에, 지하철 문에, 동네 아파트나 초등학교 담벼락에도 시가 붙어 있다. 광화문 글판이 그
씨앗이다.
김광일 논설위원실
논설위원 kikim@chosun.com
프리미엄조선 / 입력 : 2015.10.15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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