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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야생화의 천국' 천마산

글모음(writings)/꽃과 나무

by 굴재사람 2015. 4. 2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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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수도권 '야생화의 천국' 천마산

 

 

이른 봄, 서울 근교, 야생화의 천국. 상세 검색으로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친다면 아마 천마산이 뜨지 않을까 싶습니다. 천마산은 경기도 남양주시의 화도읍과 오남읍의 경계 지점에 812m 높이로 우뚝 솟아 있습니다.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산세가 험해 조선 시대 때 임꺽정이 본거지를 두고 활동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려 말에는 이성계가 이곳에 사냥을 왔다가 험준한 산세에 놀라 지나가는 농부에게 산 이름을 물어보았으나 모른다고 하자 “인간이 가는 곳마다 청산은 수없이 있지만, 이 산은 매우 높아 손이 석 자만 더 길었으면 하늘을 만질 수 있겠다.”라고 한 데서 천마산(天摩山)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만큼 천마산은 높이와 웅장함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압도하는 산입니다.

산이 높으면 계곡도 깊은 법. 다른 곳에는 없는 식물이 살 가능성이 큽니다. 계곡이 봄꽃에 좋은 또 다른 이유는 생존에 필요한 수분과 영양분이 풍부하게 공급되는 곳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겨울에도 봄에 피울 꽃을 준비하느라 땅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천마산 북사면 오남읍 쪽이 봄철 야생화 천국

그러나 천마산이라고 해서 모두 다 야생화의 천국은 아닙니다. 특히 이른 봄에 천국 소리를 들으려면 일단 북사면이어야 합니다. 볕은 남사면이 더 잘 들지만, 봄꽃들은 북사면에서 일찌감치 피기 시작합니다.

열악한 북사면에서 이른 봄에 꽃 피는 식물들이 대단해 보입니다. 하지만 냉철한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경쟁에서 밀렸거나 경쟁을 피하려는 식물입니다. 그렇기에 사는 장소를 열악한 곳으로 옮겨야 했고, 꽃을 피우는 시기도 일찍 앞당기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형편이 좋지 않으면 땅값이나 전세금이 싼 곳으로 이사 가고,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사람이나 식물이나 최상의 목표는 생존이기에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수도권 '야생화의 천국' 천마산

▲천마산 등산 안내도

천마산에서 천국의 입지 조건에 해당하는 북사면 계곡은 오남읍의 팔현리입니다. 등산로 지도에도 잘 표시되지 않는 곳으로, 한때 야생화 사진가들의 공공연한 비밀 장소였습니다. 오남저수지를 왼쪽에 끼고 팔현리 계곡을 향해 막다른 곳까지 들어가면 다래산장가든이라는 곳이 나옵니다.

그곳을 기점으로 산행을 시작하면 얼마 가지 않아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구간에 이릅니다. 거기서부터 야생화가 잔뜩 나타나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맞습니다. 천국에 발을 들였으니 휴대전화는 잠시 꺼두셔도 됩니다.

◆허리 굽혀 “너도 바람꽃이냐” 묻고 싶은 너도바람꽃

이맘때면 천마산 계곡은 너도바람꽃이 무더기로 솟아납니다. 이른 봄에 피는 변산바람꽃과 쌍벽인 꽃으로, “너도 바람꽃이냐?” 하고 허리 굽혀 묻고 싶을 정도로 작습니다. 봄소식이 채 올라오기도 전에 피는 꽃이다 보니 뒤늦게 눈이 내려 쌓이면 눈 속에 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있는 곳에는 지천이니까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너무 이르다며 봄 산행에 선뜻 현관문을 나서지 못하는 분들은 아마 평생 사진으로 볼 수밖에 없겠지만요.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수도권 '야생화의 천국' 천마산

▲눈 속에 핀 너도바람꽃

너도바람꽃도 우리의 상식과는 약간 다른 꽃 구조를 가졌습니다.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꽃잎이 아니라 꽃받침잎이고, 그 안쪽에 주황색으로 둥글게 둘러쳐진 것이 진짜 꽃잎입니다. 그래서 꽃이 사격에서 쓰는 표적지처럼 보입니다.
<너도바람꽃 자세히 알기>

천마산에는 너도바람꽃 외에 2종의 바람꽃 종류가 더 자랍니다. 꿩의바람꽃과 만주바람꽃이 그것입니다. 꿩의바람꽃이야 계곡 주변이면 어딜 가도 흔하지만, 만주바람꽃은 있는 곳에만 있는 편입니다.

너도바람꽃보다도 작은 꽃이 여러 송이 피어난 모습을 보면 가지에 앉아 재잘거리는 참새들이 연상됩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방계 식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제주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됩니다.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수도권 '야생화의 천국' 천마산

▲만주바람꽃

만주바람꽃에는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다른 바람꽃 종류들은 꽃잎이 없거나 다른 모양으로 변형되어 있는데, 만주바람꽃은 꽃받침잎과 수술 사이에 거의 온전한 형태의 꽃잎이 존재합니다. 작은 꽃이라도 크게 봐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만주바람꽃 자세히 알기>

◆금붙이처럼 보이는 노란꽃을 피우는 ‘금괭이눈’

계곡 가까운 곳에는 괭이눈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꽃들이 나와 봄볕을 즐깁니다. 산괭이눈이나 애기괭이눈이 가장 많이 피어납니다만, 천마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금괭이눈입니다. 학계에서는 아예 천마괭이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꽃이 필 무렵에 온통 노란색으로 변한 모습이 정말 금붙이처럼 보입니다. 숲에서 무더기로 핀 모습을 볼 때면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 듭니다.

괭이눈이라는 이름은 고양이의 눈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꽃이 고양이의 눈을 닮았다는 설명이 인터넷에 떠돌 때가 있어 실소를 터뜨리게 합니다. 꽃이 아니라 열매가 세로로 갈라진 모습에서 고양이의 눈을 연상한 이름입니다. 볕이 잘 드는 곳에 앉아 동공을 축소한 채 가늘게 뜬 고양이의 눈 말입니다.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수도권 '야생화의 천국' 천마산

▲금괭이눈
<금괭이눈 자세히 알기>

◆잎 표면에 점무늬 있는 현호색 ‘점현호색’

현호색 종류도 제법 많이 나타납니다. 그중에서도 점현호색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현호색과 닮았으나 잎의 표면에 점무늬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잎의 무늬 외에 꽃이나 포엽의 모습도 워낙 특징적인 종입니다만, 다른 지역의 것들을 살펴보면 유사종과의 중간형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점무늬가 아예 없는 것도 눈에 띄고요. 그러니 종간의 경계가 모호하기는 점현호색도 마찬가지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수도권 '야생화의 천국' 천마산

▲점현호색
<점현호색 자세히 알기>

◆주변 눈도 녹일 정도로 열을 올리며 꽃 피우는 ‘앉은부채’

천마산 일대는 앉은부채의 천국이기도 합니다. 높이 갈 곳도 없이 등산로 기점인 다래산장가든 뒤편으로도 앉은부채가 낙엽을 뚫고 올라와 꽃 같지도 않은 꽃을 2월부터 피우느라 열을 올립니다.

꽃이 열을 올린다니 과장처럼 들리시겠지만, 앉은부채만큼은 과장이 아닙니다. 호흡열로 주변의 눈도 녹여가며 꽃을 피우니까요. 두꺼운 외투 같은 조직 덕분입니다. 그것은 천남성과의 식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직으로, 부처님의 후광(불꽃)처럼 보이는 포엽이라는 뜻에서 불염포(佛燄포苞)라고 합니다.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수도권 '야생화의 천국' 천마산

▲눈 속에 핀 앉은부채

앉은부채라는 이름도 꽃의 모양이 앉아 있는 부처 같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입니다. 두툼한 꽃이 까까머리와 닮은 데다가 후광처럼 보이는 불염포를 두른 모습이 영락없는 부처님입니다. 밤이 되면 미물들에게 안방을 내주어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하니 부처님의 자비까지도 흉내 내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마 코는 꽉 막고 자야 할 겁니다. 꽃은 물론이고 앉은부채의 몸에서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가 나니까요. 그런 냄새를 좋아하는 딱정벌레 같은 작은 벌레들을 유혹해 꽃가루받이한다고 합니다.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수도권 '야생화의 천국' 천마산

▲앉은부채 속의 거미

앉은부채의 불염포는 색깔에서 다양한 변이가 나타납니다. 대개 흑갈색이지만 연한 갈색도 있고 안쪽이 오렌지색을 띠는 것도 있습니다. 천마산의 높은 지대에는 불염포가 노란색인 것이 자랍니다. 사진동호인들은 그것을 노랑앉은부채라고 부릅니다.
<앉은부채 자세히 알기>

남채로 인해 지금은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인쥐들이 파 간 흔적은 폭탄 맞은 전쟁터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가끔 천마산 주변의 다른 곳에서 드물게 한두 개씩 발견되기도 합니다만, 잡티 하나 없는 노란색은 아닌 경우가 많아 천마산의 노랑앉은부채가 그리워지곤 합니다.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수도권 '야생화의 천국' 천마산

▲오렌지색 앉은부채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수도권 '야생화의 천국' 천마산

▲노랑앉은부채

이런 건 사실 일례에 불과합니다. 야생화의 천국에 천사가 아닌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입장하다 보니 벌어지는 일들일 것입니다. 천마산에 멸종위기Ⅰ급 식물이 있다는 사실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계속되는 훼손으로 천국의 문이 닫히기 전에 얼른 가보시라는 저의 말도 어쩐지 모순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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