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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모음(writings)/꽃과 나무

by 굴재사람 2015. 3. 17.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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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단풍나무는 채 물들지도 못하고 말라버린 가을 잎을 여태 매달고 있다. 숲은 새잎 하나 없이 메말랐어도 어딘지 때깔이 다르다. 높다란 가지 끝이 발그레하다. 봄 타느라 가려운 모양이다. 숲속에 키 작은 나무 한 그루가 도드라진다. 가지가 햇빛을 뒤에서 받아 반투명 빨간빛으로 반짝인다. 쪽동백나무 여린 가지다. 막 빨간 허물을 벗을 참이다. 길게 찢듯 쪽쪽 벗겨진다 해서 쪽동백이다. 봄이 깊어지면 그 햇가지에 줄줄이 하얀 꽃을 매달 것이다.

 

▶엊그제 토요일 기온이 12도까지 올랐다. 황사도 미세 먼지도 없이 맑았다. 이런 날 집에 있긴 억울하다. 과천 서울대공원 산림욕장을 걸었다. 공원을 에워싼 청계산 중턱을 오르락내리락하며 7㎞ 한 바퀴를 돌았다. 아침 9시 문 열자마자 들어섰더니 한갓지다. 응달엔 겨울이 고집스럽게 웅크리고 있다. 바위 틈으로 흘러내리던 물이 두껍게 얼어붙었다. 그래도 볕이 다르다. 바람이 있지만 차지 않다. 볼을 어루만진다. 봄이 겨울을 쫓아내고 있다.


	만물상 일러스트

▶남녘엔 벌써 매화 축제라지만 꽃눈 맺은 생강나무가 반갑다. 김유정 단편 '동백꽃'에서 '나'와 점순이가 끌어안고 '노란 동백꽃' 더미로 쓰러진다. '알싸한 향긋한 그 냄새에 정신이 아찔했다'는 '동백'이 생강나무다. 잎과 가지에서 생강 냄새가 난다. 강원도에선 동백이라고 불렀다. 열매에서 기름 짜 동백기름 대신 머리에 발랐다. 생강나무는 비슷하게 생긴 산수유처럼 서둘러 피어 봄을 알린다.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운다. 꽃이 수수해도 이른 봄 잿빛 숲에선 돋보인다. 벌 나비를 꼬이려는 몸짓이다.

 

▶산책로 중간쯤 정자에 앉아 커피와 사과를 꺼냈다. 부스럭거리는 소릴 들었는지 고만고만한 동고비와 박새들이 냉큼 날아온다. 종종걸음으로 발치까지 다가와 쳐다본다. 먹을거리 내놓으라 한다. 몸집 오동통한 동고비 깃털이 유난히 파랗다. 봄은 봄이다. 사과를 이로 잘게 쪼개 놓아줬더니 보는 둥 마는 둥 한다. 과자나 빵 부스러기에 입맛을 들인 탓이다.

 

▶먹을것 안 가리는 직박구리도 날아왔지만 낯은 가린다. 멀찌감치 나무에 앉아 눈치만 살핀다. 관심 없는 척 딴청 부리길래 일어서서 자리를 비켜줬다. 양지바른 길은 벌써 질퍽거린다. 진창에 신발 버리지 말라고 발처럼 엮은 짚을 깔아뒀다. 입장료 3000원이 아깝지 않다. 연둣빛 신록 철에 다시 와야겠다. 어제는 서울 낮 기온이 17도를 넘었다. 평년보다 6도를 웃돌았다. 그런데도 광양 매화는 덜 피어 사람들이 실망했다고 한다. 하긴 순순히 오는 봄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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