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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관한 시 모음

글모음(writings)/좋은 시

by 굴재사람 2014. 10. 10.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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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관한 시 모음> 이태수 시인의 '마음의 길 하나 트면서' 외


+ 마음의 길 하나 트면서

마음을 씻고 닦아 비워내고
길 하나 만들며 가리.

이 세상 먼지 너머, 흙탕물을 빠져나와
유리알같이 맑고 투명한,
아득히 흔들리는 불빛 더듬어
마음의 길 하나 트면서 가리.

이 세상 안개 헤치며, 따스하고 높게
이마에는 푸른 불을 달고서,
(이태수·시인, 1947-)


+ 구부러진 길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이준관·시인, 1949-)


+ 길

사람에게는 사람의 길이 있고
개에게는 개의 길이 있고
구름에게는 구름의 길이 있다
사람 같은 개도 있고
개 같은 사람도 있다
사람 같은 구름도 있고
구름 같은 사람도 있다
사람이 구름의 길을 가기도 하고
구름이 사람의 길을 가기도 한다
사람이 개의 길을 가기도 하고
개가 사람의 길을 가기도 한다
나는 구름인가 사람인가 개인가
무엇으로서 무엇의 길을 가고 있는가
(한승원·시인이며 소설가, 1939-)


+ 길

문득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본다
왠가 꼭 잘못 들어선 것만 같은
이 길

가는 곳은 저기 저 계곡의 끝
그 계곡의 흙인데
나는 왜 매일매일
이 무거운 다리를 끌며
가고 있는 것일까

아, 돌아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는
이 길.
(이영춘·시인, 1941-)


+ 아픔과 슬픔도 길이 된다

오랜 시간의 아픔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아픔도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바람 불지 않는 인생은 없다.
바람이 불어야 나무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이유다.
바람이 우리들을 흔드는 이유다.

아픔도 길이 된다.
슬픔도 길이 된다.
(이철환·소설가, 1962-)


+ 그릇

집 안에 머물다 집 떠나니
집이 내 안에 와 머무네

집은 내 속에 담겨
나를 또 담고 있고

지상에서 가장 큰 그릇인 길은
길 밖에다 모든 것을 담고 있네
(함민복·시인, 1962-)


+ 길 위에서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 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나희덕·시인, 1966-)


+ 그런 길은 없다

아무리 어둔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고,
아무리 가파른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통과했을 것이다.
아무도 걸어가 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다.
나의 어두운 시기가
비슷한 여행을 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베드로시안)


+ 마음이 담긴 길을 걸어라

마음이 담긴 길을 걸어라.
모든 길은 단지 수많은 길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대가 걷고 있는 그 길이
단지 하나의 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대가 걷고 있는 그 길을
자세히 살펴보라.
필요하다면 몇 번이고 살펴봐야 한다.
만일 그 길에 그대의 마음이 담겨 있다면
그 길은 좋은 길이고,
만일 그 길에
그대의 마음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대는 기꺼이 그 길을 떠나야 하리라.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길을
버리는 것은
그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결코 무례한 일이 아니니까.
(돈 후앙·야키족 치료사)


+ 길 위에서 말하다

길 위에 서서 생각한다
무수한 길을 달리며, 한때
길에게서 참으로 많은 지혜와 깨달음을 얻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을 찬미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온갖 엔진들이 내지르는 포효와
단단한 포도(鋪道) 같은 절망의 중심에 서서
나는 묻는다
나는 길로부터 진정 무엇을 배웠는가
길이 가르쳐준 진리와 법들은
왜 내 노래를 가두려 드는가

길은 질주하는 바퀴들에 오랫동안 단련되었다
바퀴는 길을 만들고
바퀴의 방법과 사고로 길을 길들였다

상상력이여,
꿈이여
희망이여
길들여진 길을 따라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보이는 모든 길을 의심한다
길만이 길이 아니다
꽃은 향기로 나비의 길을 만들고
계절은 바람과 태양과 눈보라로
철새의 길을 만든다
진리와 법이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길을

도시와 국가로 향하는 감각의 고속도로여
나는 길에서 얻은 깨달음을 버릴 것이다
나를 이끌었던 상상력의 바퀴들아
멈추어라
그리고 보이는 모든 길에서 이륙하라
(유하·시인이며 영화 감독, 1963-)


+ 봄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정호승·시인, 1950-)


+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턱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 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시인, 1954-)


+조문(弔文)

뒷집 조성오 할아버지가 겨울에 돌아가셨다.
감나무 두 그루 딸린 빈집만 남겨두고 돌아가셨다

살아서 눈 어두운 동네 노인들 편지 읽어주고 먼저 떠난 이들 묏자리도 더러 봐주고 추석 가까워지면 동네 초입의 풀 환하게 베고 물꼬싸움 나면 양쪽 불러다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심판 봐주던

이 동네 길이었다, 할아버지는
슬프도록 야문 길이었다.

돌아가셨을 때 문상도 못한 나는 마루 끝에 앉아, 할아버지네 고추밭으로 올라가는 비탈, 오래 보고 있다.

지게 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할아버지가 오르내릴 때 풀들은 옆으로 슬쩍 비켜 앉아 지그재그로 길을 터주곤 했다

비탈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던 그 길은 여름 내내 바지 걷어붙인 할아버지 정강이에 볼록하게 돋던 핏줄같이 파르스름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비탈길을 힘겹게 밟고 올라가던
느린 발소리와 끙, 하던 안간힘까지 돌아가시고 나자 그만

길도 돌아가시고 말았다.

풀들이 우북하게 수의를 해 입힌 길,
지금은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길 위로
조의를 표하듯 산그늘이 엎드려 절하는 저녁이다.
(안도현·시인, 1961-)


+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시인, 1917-1945)


+ 길 위에 서다

세상의 모든 길은
어디론가 통하는 모양이다

사랑은 미움으로
기쁨은 슬픔으로

생명은 죽음으로
그 죽음은 다시 한 줌의 흙이 되어
새 생명의 분신(分身)으로

아무리 좋은 길이라도
가만히 머무르지 말라고

길 위에 멈추어 서는 생은
이미 생이 아니라고

작은 몸뚱이로
혼신의 날갯짓을 하여

허공을 가르며 나는
저 가벼운 새들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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