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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도리

글모음(writings)/좋은 시

by 굴재사람 2014. 5. 15.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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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도리 - 문성해




신생아들은 보통 아랫도리를 입히지 않는다
대신 기저귀를 채워 놓는다
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수술을 했을 때도 아랫도리는 벗겨져 있었다

할머니가 병원에서 돌아가실 때도 그랬다
아기처럼 조그마해져선 기저귀 하나만 달랑 차고 계셨다

사랑할 때도 아랫도리는 벗어야 한다
배설이 실제적이듯이 삶이 실전에 돌입할 때는 다 아랫도리를 벗어야 된다

때문에 위대한 동화 작가도
아랫도리가 물고기인 인어를 생각해 내었는지 모른다

거리에 아랫도리를 가린 사람들이 의기양양 활보하고 있다
그들이 아랫도리를 벗는 날은
한없이 곱상해지고 슬퍼지고 부끄러워지고 촉촉해진다
살아가는 진액이 다 그 속에 숨겨져 있다

신문 사회면에도 아랫도리가 벗겨져 있었다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걸
보면 눈길을 확 끄는 그 말속에는 분명 사람의 뿌리가 숨겨져 있다



    <문성애 시인>



    경북 문경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자라 』『 아주친근한 소용돌이』『입술을 건너간 이름』등



    <시작 노트>

    멀리 있는 풍경이 가까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시가 된다.
    풍경이 앞서서 나를 지휘하며 갈 때 시를 쓰는 사람은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된다.
    풍경은 그 속에 수많은 시를 숨겨 놓고 여간해선 그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무리 전후 사방에서 펜촉으로 을러대고 쑤셔 대어도 결코 빗장을 열지 않는
    그 앞에서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산문이 되어 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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