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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시모음

글모음(writings)/좋은 시

by 굴재사람 2014. 3. 1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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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시모음> 정연복의 ´어머니 산(山)´ 외

+ 어머니 산(山)

하늘에 맞닿은 높은 봉우리와
깊숙이 내려앉은 계곡

드문드문 우람한 바위들과
아가 손 만한 작은 돌멩이들

훌쩍 키 큰 나무들과
앉은뱅이 이름 없는 풀들

숨가쁜 오르막길과
편안한 내리막길

전망이 탁 트인 능선과
푸른 잎새들의 그늘 속 오솔길

천둥과 번개와 벼락
벼락 맞아 쓰러진 고목들

산은 너른 품으로
말없이 이 모든 것을 포옹한다

오!
어머니 산(山)
(정연복·시인, 1957-)


+ 산과 강은

산을 돌아 흐르는 강과
강에 제 모습을 비추는 산

항상 변함없어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오랜 세월 흐르고 또 흘러 왔지만
강은 한 번도 같은 물을
담아 본 적 없었고

늘 말없이 그 강을 지켜봤던 산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새 움을 틔워 왔었지

산과 강은 변함없는 게 아니야
부지런히 제 할 일
다 하고 있었던 거야.
(한현정·시인)


+ 산이 날 에워싸고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박목월·시인, 1916-1978)


+ 산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 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댔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봐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 좋게 엎대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과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도 되고 명산이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김광섭·시인, 1906-1977)


+ 속리산에서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나희덕·시인, 1966-)


+ 여름산

여름산은
내 어릴 적 바라본
젊었던 아버지.

푸르고 힘찬 육체가
능선을 이루며
누워, 편안히 휴식하고 있다.

내가 곁에서 웃고 울고 소리질러도
부딪치며 기어올라도
그저 귀여운 듯, 미소지으며 가만히 바라보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나는
어린 짐승처럼
한낱 여리디여린 생명체일 뿐이었다.

지금
짙푸른 여름산엔
야생의 산짐승과 날것들이 푸드득거리고
녹음을 먹은 깊은 계곡에선 물소리가
한창이지만,

젊은 아버지 같은 여름산은
능선이 구비치듯
크고 건장한 육체로 누워
산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몸짓들엔 꿈쩍도 않는다.
그저 한두 번 눈을 떴다
감았다, 할 뿐이다.
(이수익·시인, 1942-)


+ 저 산을 옮겨야겠다

저 산을 옮겨야겠다
저 산을 내가 옮겨야겠다
오늘 저 산을 내가 옮겨야겠다

먼저 산에서 ㄴ을 빼고
ㅏㅏㅏㅏ
목놓아 바깥으로 아를 풀어놓으면
산은 마침내 ㅅ만 남게 된다
두 사람 비스듬히 몸 맞대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ㅅ......ㅅ......ㅅ......ㅅ......
저 산이 움직인다
ㅅ......ㅅ......ㅅ......ㅅ......
저 산이 걸어간다
ㅅ......ㅅ......ㅅ......ㅅ......
산을 움직이는 두 사람
ㅅ......ㅅ......ㅅ......ㅅ......
사랑하는 두 사람이다
(김승희·시인, 1952-)

 

+ 산

지구엔
돋아난
산이 아름다웁다

산은 한사코
높아서 아름다웁다

산에는
아무 죄 없는 짐승과
에레나보다 어여쁜 꽃들이
모여서 살기에 아름다웁다

언제나
나도 산이 되어보나 하고
기린같이 목을 길게 늘이고 서서
멀리 바라보는




(신석정·시인, 1907-1974)


+ 산

산에는 알지 못할
무언가가 있다.

나무가 알지 못하게
자라고 있고,

흙도 알지 못하게
숨쉬고 있다,

그리고 산은
알지 못하게
우리를 품고 있다
(서동주·시인)


+ 산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정희성·시인, 1945-)


+ 숨은 산

땅바닥에 떨어진
잎사귀를 주워들다가

그 밑에 작게
고인 물 속
산이 숨어 있는 모습
보았다

낙엽 속에
숨은 산

잎사귀 하나가
우주 전체를
가렸구나
(이성선·시인, 1941-2001)


+ 산

말도 못 하는 산
도망도 못 가는 산
그 산을 이길 수 있느냐고
누가 물었어요.

아무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어요.
대신에 우리는
그 산의
친구가 되겠다 했어요.
(임길택·아동문학가, 1952-1997)


+ 함께 사는 집

산은 오르는 게 아니라
손님처럼 천천히 천천히
들어가는 거래요.

산은 나무와 풀과 새들이
함께 사는 집이라
시끄럽게 노래 부르거나
큰소리로 말해서도 안 된대요.

산은, 저 높고 푸른 산은
사람이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아주 소중한 집이래요.
(서정홍·아동문학가, 1958-)


+ 소멸

산들과 잠시나마
고요히 지내려고
산에 오르면

산들은 저희들끼리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
한 점 티끌도 안 보이게
나를 지운다.
(조태일·시인, 1941-1999)


+ 산에 가거든

산에 가거든
그 안에 푹 젖어 보아라
가만히 귀를 대고
산의 맥박이 뛰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세상의 모든 언약이 서서히
깨어지고 있는 소리를
산에 가거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풀바람이 되어 보아라
고만고만한 인연들이 모여
제각기 만들고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아라.
산에 가거든
그 경사진 산맥의 늙은 생애를,
울음소리를 들어보아라
주인 없는 무덤가에 피어난
탄식 같은 햇살 한 움큼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김지헌·시인, 1956-)


+ 산

샘물이 맑다 차갑다 해발 3천 피트이다
온통
절경이다
새들의 상냥스런 지저귐 속에
항상 마음씨 고왔던
연인의 모습이 개입한다
나는 또다시
가슴 에이는 머저리가 된다
(김종삼·시인, 1921-1969)


+ 산길

산정에서 보면
더 너른 세상이 보일 거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산이 보여주는 것은 산
산너머엔 또 산이 있다는 것이다
절정을 넘어서면
다시 넘어야 할 저 연봉들......

함부로 희망을 들먹이지 마라
허덕이며 넘어야 할
산이 있어
살아야 할 까닭이 우리에겐 있다
(복효근·시인, 1962-)


+ 산 입구의 팻말에 적혀 있는 시

낯선 자여.
만일 당신이 학교가 필요하지 않는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진리를 배웠다면,
세상이 죄와 불행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았다면,
세상의 슬픔과 범죄와 걱정 근심을 충분히 보았다면,
그리하여 그런 것들이 당신을 지치게 만들었다면
이 산으로 들어와
자연의 품에 안기도록 하라
고요한 그늘이
당신에게도 고요함을 안겨줄 것이며
푸른 잎사귀들을 춤추게 하는 부드러운 바람이
당신의 멍든 가슴에
연고를 발라주리라
(작자 미상)

 

+ 산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소리로 길을 열며
사람들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겨보지요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함민복·시인, 1962-)


+ 산이 나를 기다린다

˝오늘도 산에 갈래요?˝
비오는 날, 아내 목소리도 젖었다.
˝가 봐야지 기다리니까˝
˝누가 기다린다고˝
˝새가 나무가 풀이 꽃이 바위가 비를 맞으며 기다리지˝
˝그것들이 말이나 할 줄 아나요˝
˝천만에, 말이야 당신보다 잘하지˝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시인데
아내는 아직 나를 모른다
(이생진·시인, 1929-)


+ 산

눈 덮인 고향마을이다
웅숭깊은 어머니의 큰 가슴이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은 경전의 바다다
생명이 철마다 피고 철마다 지는 영원한 안식처이다
산 자들이 겸허히 고개 숙이는 거대한 자연이다.
(김인화·시인)


+ 산경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도종환·시인, 1954-)


+ 산 동안거에 들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낙엽자리인가
바스락 우두둑 골절된 가랑잎들
고요의 뼈를 들추는 경계를 지운 산
나를 불러들이고 허둥지둥 지나온 길
돌아가는 길 또한 오리무중,

누가 누구의 길을 동행하고
누가 누구의 삶을 대신할 수 있는가
네가 내게 마음이 없으면 오지 않을 터
내가 네게 길이 없으면 가지 못할,

눈을 뜨면 어느새 산 빛 풀빛 본연의 모습
전광석화 번쩍 오가는 시간의 화살도 잠시
머물지 못하고 떠나가네, 그렇게 낡아 사라지네

사람들아, 禪에 든 저 깊은 산 깨우지 마라
(송문헌·시인, 충북 괴산 출생)


+ 2월 산

부푼 유두를 싸매고
만삭의 여자는 근신중이다

꽃 피던 시절에 눈 맞아
사랑인들 푸지게 했던가

나비야 벌이야 문이 닳도록 드나들더니
입덧나 토악질 한 뒤론 얼씬도 않고

짐승들의 집이 되는 일
그늘이 되는 일
바람을 다스리며
곱게 죽는 일까지
여자의 태교는 끝이 없고

태아는 자궁에서 배를 걷어찬다
마침내 양수가 터지고
신음 소리 커진다
(운준경·시인, 경기도 양주 출생)


+ 안 가본 산

내 책장에 꽂혀진 아직 안 읽은 책들을
한 권 뽑아 천천히 읽어가듯이
안 가본 산을 물어물어 찾아가 오르는 것은
어디 놀라운 풍경이 있는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떤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마냥 흘러가고픈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산길에 무리 지어 핀 작은 꽃들 행여 다칠까 봐
이리저리 발을 옮겨 딛는 조심스러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누대 갈참나무 솔가지 흔드는 산바람 소리 또는
그 어떤 향기로운 내음에
내가 문득 새롭게 눈뜨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성깔을 지닌 어떤 바위벼랑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새삼 높은 데서 먼 산줄기 포개져 일렁이는 것을 보며
세상을 다시 보듬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직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사랑의 속살을 찾아서
거기 가지런히 꽂혀진 안 읽은 책들을 차분하게 펼치듯
이렇게 낯선 적요 속으로 들어가 안기는 일이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이성부·시인, 1942-)


+ 산에 가는 이유

산에 가는 것은 밥 먹는 것과 같아야 하고
잠자는 것과 닮아야 한다.

번개 치는 날도, 천둥 우는 날도
산 타는 일이 처갓집 가듯
당당해야 한다.

소낙비 억수로 맞고 어질어질 취해
산 내려옴도 술 먹는 날인 양
자주 있어야 한다.

발가벗고 발길 닿는 대로 능선 쏘다니는 일도
여름 찬물 마시듯
부담 없어야 한다.

노는 날
날빛 고루 환한 날 택해
요란한 산 여럿이 감은
빛 좋은 개살구 된다.

산 가는 일은
별식 같아선 안 된다.
바람 불어도 산 가야 하고
가슴 뛰어도 산 올라야 된다.

기쁨 돋을 시나 슬픔 잠길 때만
가는 산은
절름발이 산행이다.

산 가는 것은 잠자는 것과
같아야 하고, 밥 먹는 일과
닮아야 한다.
(성락건·시인)


+ 산

내 소원이 무엇인지 아나
소원이 생각날 리 없는 산골이라
아내는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뭔데
내가 산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람 안 사는 저런 큰 산 하나를 사는 것이다
그러자 아내는 갑자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저 쓸데없는 것 사서 뭐하게 또 빌어먹을라카네
내가 풀이 죽어 말했다
개간해서 농사 지을라 안칸다
나는 말없이 산을 둘러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나한테는 필요 없지만 나무들한테 산이 필요해서 내가 사고 싶은 것이다
안개한테 구름한테 산이 필요해서 내가 사고 싶은 것이다
내가 사도 누가 사는지 산이 모르기 때문에 내가 사고 싶은 것이다
사도 아무 소용없는 빈 산이라 내가 사고 싶은 것이다
내 만년에 그런 산에 혼자 살고 싶어 내가 사고 싶은 것이다
(이문길·시인, 1939-)


+ 다시 山에 와서

세상에 그 흔한 눈물
세상에 그 많은 이별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으로 다시 와
정정한 소나무 아래 터를 잡고
둥그런 무덤으로 누워
억새풀이나 기르며
솔바람 소리나 들으며 앉아 있으리.

멧새며 소쩍새 같은 것들이 와서 울어주는 곳,
그들의 애인들꺼정 데불고 와서 지저귀는
햇볕이 천년을 느을 고르게 비추는 곳쯤에 와서
밤마다 내리는 이슬과 서리를 마다하지 않으리.

내 이승에서 빚진 마음들을 모두 갚게 되는 날.
너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백발로 졸업하게 되는 날
갈꽃 핀 등성이 너머
네가 웃으며 내게 온다 해도
하나도 마음 설레일 것 없고
하나도 네게 들려줄 얘기 이제 내게 없으니
너를 안다고도
또 모른다고도
숫제 말하지 않으리.

그 세상에 흔한 이별이며 눈물,
그리고 밤마다 오는 불면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에 다시 와서
싱그런 나무들 옆에
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하늘의 천둥이며 번개들을 이웃하여
떼강물로 울음 우는 벌레들의 밤을 싫다하지 않으리.
푸르디푸른 솔바람 소리나 외우고 있으리.
(나태주·시인, 1945-)


+ 산, 하나님의 병원

한 마리 뱀처럼
산 속으로 사라진 길
회색 장삼을 입은 수도승도
길과 함께 숲 속으로 사라지고
저만 그들의 행방을 아노라
떠가는 구름이 벙글거리더라.

하나 아프지 않고 유쾌하게
울창한 숲의 온갖 향기로 치료하는
하나님이 차려 놓은 이 거대한 병원,
맑은 물과 바람, 새들의 노래 소리에
몸과 마음 구석구석 때를 씻어 헹구고
비쭉비쭉 치솟은 웅장한 산봉우리들은
산 같은 용기를 가지라 외쳐대고
더러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돌부리까지
걱정 근심 시기 질투 미움 탐욕
세상 보따리 다 팽개치고 돌아가란다.
영원한 생명 근원의 산으로부터
밀려드는 생기를 가득 채워 가란다.

우거진 잎새 사이로
곰보자국처럼 떨어진 햇살에도
전율하는 돌단풍과 그 둘레의 작은 풀잎들
순결한 사랑은 스치는 바람결에도 소스라치고
하늘 향해 반짝이는 잎새들의 해맑은 표정
아픈 곳을 싸매 주는 부드러운 붕대 같은
하얀 구름 가만히 떠가는 깊은 골짝
세상 어떤 음악보다 살아 역동하는 물소리
산이 품고 있는 모든 것을 양약(良藥)으로
사람들의 상처 입은 마음과 지친 육신을
고치고 치료하는
오, 보이지 않는 위대한 손길!

작은 풀꽃들의 비밀 하나도 모르면서
바위는 여전히 성불을 위해 참선 중인지
머리만 내놓고 가부좌로 앉아서
세상 찌끼 다 토하고 내려가도 말이 없고,
멀어져 가는 새들의 노래에 뒤돌아보며
신비한 능력으로 치료받아 나무들처럼 싱싱해진
사람들은 선함과 아름다움과 진실함과 거룩함과
사랑과 기쁨의 신의 성품으로 가슴을 채우고
산의 수문장 전나무들의 씩씩한 전송을 받으며
싱그러운 물처럼 바람처럼 내려오고 있더라.
(최진연·시인, 경북 예천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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