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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시모음

글모음(writings)/좋은 시

by 굴재사람 2014. 3. 1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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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시모음> 이성선의 ´하늘 악기´ 외

+ 하늘 악기

높은 하늘 중턱을 길게 이어져
떠가는 태백산맥 줄기

흐르는 강

하늘에 매놓은 악기줄
신이 저녁마다 돌아와 연주한다

일주일에 한 번 열흘에 한 번
저 높은 길에 내 발이 올라선다

내가 하늘 악기 위를 걸으며
그분 시간을 연주하는 날이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함구(緘口)

오래 산에 다니다 보니
높이 올라 먼데를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래 높은 데 오르다 보니
나는 자꾸 낮은 데만 들여다보고
내가 더 낮게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산이 가르쳐주었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매사를 깊고 넓게 생각하며
낮은 데로만 흐르는 물처럼
맑게 살아라 하고 산이 가르쳤습니다
비바람 눈보라를 산에서 만나면
그것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 내 버릇이었는데
어느 사이 그것들을 피해 내려오거나
잠잠해지기를 기다려 올라갈 때가 많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낮은 데가 더 잘 보이고
내가 더 고요해진다는 것을 갈수록 알겠습니다나
나도 한 마리 미물에 지나지 않으므로
입을 다물어 나의 고요함도 산에 보탭니다
(이성부·시인, 1942-2012)


+ 산을 오르며

산을 오르며
세상을 건너는 법을 배웁니다
사무치는 바람소리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가는 소리 들어봅니다

세월의 찌꺼기 이내 바람에 부서집니다
바람소리에 폭우처럼 떨어지고
내 마음에도 부서져 폭우처럼 비웁니다

산을 둘러앉은
한줄기 내일의 그리움을 밟고
한줄기 그리움으로 산을 오릅니다
구름처럼 떠서 가는 세월 속에
나도 어느새 구름이 됩니다

소리 없이 불러 보는 내 마음의 내일
적적한 산의 품에 담겨
내 생각은 어느새 산이 됩니다
산을 오르며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는 꿈을 꿉니다
홀로 서 있어도 외롭지 않을
산의 그리움을 배웁니다
(강진규·시인, 서울 출생)


+ 산을 오르는 당신

가슴 아픈
사랑의 열병
침묵으로 앓은 후
그대는 산을 올랐노라 했습니다

능선도 흐느끼는 길 따라
추억은 계곡에 버리고
미련은 소나무 가지에 걸어
이름 모를 산새 먹이로 주었노라 했습니다

모기의 흡혈 두려워
산을 멀리하던 그대의 변화
사랑의 아픔이
깊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대가 다녀간 높고 낮은 산
꺾어진 가지마다 걸어놓은 미련
아직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것은
산새들도 안타까워 먹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손희락·문학평론가 시인, 대구 출생)


+ 산울림

산에 올라
나무 그늘에 앉아
흐르는 땀을 훔친다.
먼 산을 바라보며
나를 보낸다.

야호~~~
그 소리에 마음을 담아
멀리멀리 보낸다.

나를 떠난 소리는
마음을 헤아리기도 한 듯
산을 울려 다시 돌아온다.
산에 오를 때마다 정다운 대화를 나눈다.

풀, 나무, 돌, 바람, 새, 벌레, 햇빛, 구름,...
언제나 변치 않고
푸르름을 내뿜는
네가 한없이 부럽기만 하구나.
(허정虛靜·시인)


+ 산에 가면

산에 가면
비바람만 불어도
서로서로 어깨를 다독여 주는
나무를 본다

산에 가면
뇌성벽력 요란해도
같이 비를 맞아 주는
바위의 묵묵함을 본다

철 따라 단장하는
산의 순한 세상은
천 년을 살고도 만 년을
늙지 않는 모습을 본다

제 몸 하나 추스르기 가뻐
치부 속 깊은 숨 몰아쉴 때
우린 마음을 털어

산 속에서 만나는 이름 모르는 이들
덥석 손잡아 주진 못해도
반가운 인사로 복 지으며

천연스런 산이 되자
산에 가면
산에 가면
(혜유 이병석·시인)


+ 산 위에서

산 위에서 보면
바다는 들판처럼 잔잔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새싹처럼 솟아오르고 싶은
고기들의 설렘을.

산 위에서 보면
들판은 바다처럼 잔잔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고기비늘처럼 번득이고 싶은
새싹들의 설렘을.

산 위에 서 있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순한 짐승
그러나 너는 알 거야
한 마리 새처럼 날고 싶은
내 마음의 설렘을.
(김원기·아동문학가, 1937-1988).


+ 등산·4

등산하는 목적을 묻기에
등산이라 했네

등산하는 재미를 묻기에
또 등산이라 했네

등산에서 얻은 걸 묻기에
등산이라 했네

등산에서 남은 걸 묻기에
또 등산이라 했다네.
(김원식·시인, 강원도 영월 출생)


+ 내려다보는 산

내가 산에 저 험한 산에 오르는 까닭은
눈빛, 그 서늘한 눈빛 때문이다

내가 산에 저 험한 산에 오르는 까닭은
모든 것의 등뒤를 비추는
그 서늘한 눈빛 때문이다

나의 이 장난 같은 일상 가운데
엄습해오는 그 눈빛
모든 것의 등뒤에 와
퍼부어대는 소나기 같은 눈빛 때문이다

내가 산에 저 험한 산에 오르는 까닭은
내려다보는 산은 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무산·노동운동가 시인, 1955-)


+ 도봉산

굽이굽이
길다란 능선들의

저 육중한 몸뚱이
하늘 아래 퍼질러 누워

그저 햇살이나 쪼이고
바람과 노니는 듯

빈둥빈둥
게으름이나 피우는 듯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틈에
너의 온몸

연둣빛 생명으로
활활 불타고 있는가

정중동(靜中動)!

고요함 속
너의 찬란한 목숨
(정연복·시인, 1957-)


+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나는 인생이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산맥에는 무수한 산이 있고 각 산마다 정상이 있다.

그런 산 가운데는 넘어가려면
수십 년 걸리는 거대한 산도 있고,
1년이면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산이라도 정상에 서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한 발 한 발 걸어서 열심히 올라온 끝에 밟은 정상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산의 정상에 올랐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게 모인 정상들과 그 사이를 잇는 능선들이
바로 인생길인 것이다.

삶을 갈무리 할 나이쯤 되었을 때,
그곳에서 여태껏 넘어온 크고 작은 산들을
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
(한비야·오지 여행가, 1958-)

 

+ 산으로 가는 마음

내 마음
주름살 잡힌 늙은 산의
명상하는 얼굴을 사랑하노니,

오늘은 잊고 살던 산을 찾아 먼길을 떠나네.
산에는 그 고요한 품안에 고산식물들이 자라니.

마음이여
너는 해가 저물어 이윽고 밤이 올 때까지
나를 찾아오지 않아도 좋다.

산에서
그렇게 고요한 품안을 떠나와서야 쓰겠니?
(신석정·시인, 1907-1974)


+ 산에서·4

등산하는 목적을 묻기에
등산이라 했네

등산하는 재미를 묻기에
또 등산이라 했네

등산에서 얻은 걸 묻기에
등산이라 했네

등산에서 남은 걸 묻기에
또 등산이라 했다네.
(김원식·시인, 강원도 영월 출생)


+ 등산

숨이 목에 찬다
힘들어 땅만 보고 앞으로 앞으로

이 깔딱고개만 넘으면 하늘밑
높은 꼭지에 닿겠지

능선을 넘고 계곡에 닿으면
시원한 한줄기 바람의 인사

들꽃들의 미소
새소리, 물소리, 벌레소리

장엄한 오케스트라가 되어
환영의 팡파르 울리고

말하지 않아도
엉덩이 땅에 내려앉고

목에 찬 숨이 환희로
눈에는 초록빛 가득하고

코에는 풀향기 넘치어
막혔던 가슴 뚫어지니

이곳이 선경이로구나
생각하면 더욱 선경이 되고

몸을 감싼 땀은
한줄기 얼음 되어 기쁨을 뿌리는 찰나

또 다른 기쁨으로 들어가려
걷고 걷는 등산

환희요, 기쁨이요, 즐거움이 가득한
그곳을 오르고 또 오르려니
(박태강·시인, 1941-)


+ 등산과 삶

산을 오를 때면
먼 정상을 바라보지 말라.
발끝만 쳐다보며
한발 한 발 내딛으라.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면
포기하고 싶어도
온 길을 생각하며
되돌아가지 마라.
오르다 지칠 때면
그 자리에 잠시 멈추라.
팔 다리에 힘이 솟고
의지는 되살아나리라.
산을 즐기며
산과 대화를 나누라
바람소리 새의 노래에
산과 하나가 되라.
삶이란 산을 오르는 일
언제나 가파르지만
저기 정상이 보인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박인걸·시인)


+ 동반자

산을 오르다 바위를 만났다
자일도 없이 올라야 하는 바위
가능과 불가능을 잠시 생각한다
통과해야 하는 길이므로.
가능에다 동그라미를 친다
바위를 눈으로 더듬는다
그의 빈틈과 상처가 보인다
빈틈의 크기와 상처의 깊이를
마음에 새긴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나중엔 확실하게
그의 틈에 손을 넣는다
바위의 지문과 내 지문이 섞인다
온몸을 그의 상처에 댄다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그의 틈과 상처를 내 것으로 품는다
두 몸이 하나가 된 마음
가파른 길을 통과해 간다
(유봉희·시인)


+ 산길

한 사람 지나가기 빠듯한 산길에 아카시아 우거져 드문드문 햇빛이 비쳤습니다.
길은 완전히 막힌 듯했습니다.
이러다간 길을 잃고 말 거란 생각에, 멈칫멈칫 막힌 숲 속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떨면서, 가슴 조이며 우리는 산길을 내려왔습니다.
언제나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었지요.
(이성복·시인, 1952-)


+ 등산 길

짙푸른 물결 속 뚫고
햇살 굴러 이는
고운 숨결 일렁이는 산골

땀흘려 헐떡이다
산새들 몰려가는 길섶에 앉으니

나무와 나무 사이 누벼온 보람인가
짜릿이 감도는 수액의 몸살 파고들어
찌든 도시의 찌꺼기 사라지고

영혼의 눈시울에
가득히 출렁이는 순수의 날개
훨훨 깃을 친다.
(곽병술·시인, 1929-)


+ 산행법

山을 보고서는 사람의 말로 인사하지 말 것.
山은 산(生)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함.

세상을 멀리하기 위해서 사람과 헤어지기 위해서
山을 찾는 것이니까 山에 와서 세상 얘기를 해서는 안됨.
가장 높은 정상에 오른 것은 사람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임. 그럴수록 하느님 곁에 가까워지는 것.
그럴수록 삶을 가볍게 버릴 수 있음.

山行은 흙이 되는 연습임. 山을 보면 언제나
죽는시늉을 해야 됨.
(박철·목사 시인)


+ 산행·2

이른 아침에는 나무도 우는구나
가는 어깨에 손을 얹기도 전에
밤새 모인 이슬로 울어버리는구나.
누가 모든 외로움을 말끔히 씻어주랴.
아직도 잔잔히 떨고 있는 지난날,
잠시 쉬는 자세로 주위를 둘러본다.
앞길을 묻지 않고 떠나온 이번 산행,
정상이 보이지 않는 것 누구 탓을 하랴.
등짐을 다시 추슬러 떠날 준비를 한다.
시야가 온통 젖어 있는 길.
(마종기·시인, 1939-)


+ 도반

벽에 걸어놓은 배낭을 보면
소나무 위에 걸린 구름을 보는 것 같다
배낭을 곁에 두고 살면
삶의 길이 새의 길처럼 가벼워진다
지게 지고 가는 이의 모습이 멀리
노을 진 석양 하늘 속에 무거워도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혹은 걸어가는
저 삶이 진짜 아름다움인 줄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되었을까
알고도 애써 모른 척 밀어냈을까
중심 저쪽 멀리 걷는 누구도
큰 구도 안에서 모두 나의 동행자라는 것
그가 또 다른 나의 도반이라는 것을
이렇게 늦게 알다니
배낭 질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지금
(이성선·시인, 1941-2001)


+ 산행

산이 그리워
산에 오른다
겨우내 뻥 뚫린 가슴
독아(毒牙)같은 꽃샘바람이
지나가고 나서야

봄의 가슴 불지르는 진달래는
바위의 무심함을 탓하고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산의 무심함에 나도 속상해
덩달아 눈 흘기는데

한 발 한 발
다가설 때마다
산은 부끄러운 듯
한 섬 한 섬
앞가슴을 풀어헤친다

봉우리에 올라서야
산은 제 숨은 속살을 다 보이고
온통 연분홍으로 뒤덮은 바다
진달래 위험한 향기에 취해
바위도 어쩔 수 없이
몸을 허락한다
(공석진·시인)


+ 산을 오르며

낮은 데서 바라보면
누가 저같이
높이 서고 싶지 않으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가더라도 산꼭대기
작은 꽃보다 더 작은 우리

높이 더 높이 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길 올랐나
높이 올라가
더 높이 무엇을 세우려 하나

산 가운데
사람소리 울리지 않고
메아리만 저 혼자 되돌아온다

우리도 어차피
제자리로 올 것이지만
세상은
산꼭대기에 높이 선 사람의 편
엉거주춤 산 밑의 많은 사람들

나날이 오르면서
오르지 못하면서
산봉우리 오래 바라본다.
(천양희·시인, 1942-)


+ 북한산에 올라

내려다보이는 삶이
괴롭고 슬픈 날
산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 정상에 이르러서야
사랑과 용서의 길 일러주지만
가파른 산길 오르다 보면
그 길이 얼마나 숨차고
벅찬 일인지 안다

돌아보면 내 걸어온 생의
등고선 손에 잡힐 듯
부챗살로 펼쳐져 있는데
멀수록 넓고 편해서
보기 좋구나

새삼 생각하노니 삶이란
기다림에 속고 울면서
조금씩 산을 닮아가는 것

한때의 애증의 옷 벗어
가지에 걸쳐놓으니
상수리나무 구름 낀 하늘
가리키며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길 보챈다
(이재무·시인, 1958-)


+ 겨울 산행

하얀 세계
어느 누가 당신을
먼저 정복할 수 있을까?
따스한 손 기다리는
소리 없는 침묵

겨울
그리고

그 가운데 멈춰진 자리
바람만 인다

야호∼
소리 한번 지르면
꺼지지 않는 분화구처럼
내 몸에서 번지는 하얀 열기
우주 어느 공간 머물 때
나는 정상에 서 있었다.
(노태웅·시인)


+ 산행기

때로는 시원한 때로는 절실한
울음을 쏟아내던 매미가
아이들에게 채집되고 있었다
울음으로 서까래 삼고
눈물로 등을 달았던
지난날 내 詩 또한,
표본 될 저 울음주머니처럼 간직할 가치가 있는가
묻고 물으며 산을 오를 때
앞을 가로막는 것은 절벽도 무엇도 아니었다
한 잔의 술도 한 숟갈의 밥도 아니었던 행간들,
나는 산 중턱에서 오름을 접고
철 늦은 울음을 울어야만 했다
(원무현·시인, 1963-)


+ 산을 오르며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잰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 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며 느끼고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되며
올라온 곳에서는 반드시 내려와야 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산 내려와서도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도종환·시인, 1954-)

 

+ 등산계명

5월이다
멀리서 여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산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얼마나 흐뭇한 현상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한때의
유행성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무슨 놀이의 일종이나
아베크족 따위를 위해서 선택된
어떤 사치한 방법이 아니기를 원한다

봄이 충만한 산에 올라
봄의 정취를 맛보며
멀리서 찾아오는 여름을 기다리며

산의 엄숙, 정결, 자비,
대자연과 인생에 대한
계시와 교훈을 배우기로 하자
(김길남·시인, 1942-)


+ 등산

바람이다.
소금기 하나 없는 산바람, 신바람이다.

정상은 언제나
내 마음을 흔드는
팽팽한 그녀의 앞가슴
눈을 감을수록
사방은 황홀하게 피었다 지는
이름 모를 풀꽃 향기들의 수화.

문득 칡넝쿨이 몰고 오는 벼랑 아래로
폭포다.
뿌리 깊이 묻혀 있던
원시의 야성을 깡그리 일깨우는......

나는 더 이상
두 발로 걷는 인간일 수 없다.
돌이거나 나무이거나 산짐승이거나
숨이 벅찰 무렵부터
나는 이미 산의 일부로
치환되고 있는 것이리라.
(임두고·시인, 1960-)


+ 등산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리는 생애의 중량
확고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때는 흔들린다

암벽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 않는
무명(無明)의 벌레처럼 무명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벼랑에 뜨는 별이나,
피는 꽃이나,
이슬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암벽을 더듬으며
가까이 접근한다
행복이라든가 불행 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발붙일 곳을 찾고 풀포기에 매달리면서
다만
가까이
가까이 갈 뿐이다.
(오세영·시인, 1942-)


+ 등산

오르는 것이 아니네
내려오는 것이네
굽이굽이, 두고 온 사연만큼
해거름 길어지는 산 그리메
막소주 몇 잔, 목젖 쩌르르 삼키듯
그렇게 마시는 것이네
거기 묵김치 같은 인생 몇 쪽
우적우적 씹는 것이네
지나 보면 세상사 다 그립듯
돌아 보이는 능선길
그게 즐거움이거든
(권경업·시인, 1954-)


+ 등산

오른다.
탑보다 높이
빌딩보다도 높이

오를수록
가벼워지는
육신

정상
천국행 정류장에서
셔틀바람 타고
희열 만끽한다.
(강신갑·시인, 1958-)


+ 등산

산을 오름은
세속을 멀리하고자 함이다
더 높이 오르고자 함은
보다 멀리 바라보고자 함이다

어려운 고개도,
험난한 구빗길도
묵묵히 걸으며
자신과 말없이 씨름한다
새 소리, 바람 소리에도
새 힘이 솟는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의 먼지를 모두 씻어낸다
그래서 내 몸도 내 마음도
어느 사이 초록 빛깔이 된다

반드시 정상이 아니라도 좋다
종주거나 횡단인들 누가 탓하랴
산 속에서 산의 정기를 받고
산의 호연지기를 배워
인생을 성실하게, 겸손하게
그래서 모든 세상사를 순탄하게
이끈다면
여기에 무엇을 더 바라랴

산을 오름은
교만을 버리려 함이다
인내를 배우고자 함이다
보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자 함이다
마침내는
산을 닮아
산과 내가 하나 되고자 함이다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登山등산

내가 산을 오른다.
이밥일래 보리밥일래
풀 여름을 까고 노는
아이들의 냇둑
들판도 지나서
산을 오르고 있다.

사람들이 모르는 오솔길
샘솟는 물을 마시면서
꽁지를 까딱이면서 나는 새들
찌르레기 소리조차 산을 흔드는
오존 그득한 오솔길.

길이 아닌 데로 오르다가
가시덩굴에 긁힌 사람
때로는 넘어지고 절뚝거리면서
숲 속으로 뻗쳐 내리는
햇살의 건강으로 회복되면서
또 오르고 오르는 산
집들이 점점 멀어져 간다.

세상은 약 떨어진 아편쟁이처럼
발아래 다소곳이 엎드려 있고
머리 위에 빛나는 태양
하늘이 거기 있다.
우두자국처럼 떠 있는 흰 구름
하늘이 나를 부르고 있다.
(최진연·시인, 경북 예천 출생)


+ 등산

한 발 한 발 무거운 발걸음
자국마다 살아온 생각 밟고
올라온 능선을 뒤따라온
바람이 솔잎 흔들어 지우는데

가슴 열어 침묵하고 앉은 산아
옹이져 맺힌 삶
너의 품에 안겨서야
헐떡이며 가빠오는 숨 내쉬고
평정을 되찾는다

이제까지 지고 온 무거운 고달픔
산아래 내려놓고 정상에 올라
숲 속 풀내음에 고단함을 씻어내려
마음 속 비워놓고 앉아 있는데

하얗게 산허리에서 피어오르던 안개
산은 하늘이 되어
나는 구름 타고 앉은 신선이 되었구나
(박옥하·시인)


+ 등산

고요가 좋아
푸름이 좋아
(그래 바위도 좋아)
그저 그냥
자꾸만 위로
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어디서부턴가
어디론가
길이 있었다...

한 걸음도 좋고
반걸음도 좋았다
오르고 또 올라가면서
한 개씩
반 개씩
씁쓸한 삶의 기억들을 버려가면서
시간이 어디선가 주저앉아 쉬고 있어도
그저 올라가면서
나를 잊어가면서...

구우구 어디선가 산비둘기 울고
까아까 어디선가 산까치도 날고
어디선가 향긋이 꽃내음이 불었다. 아주 진하게

아아 산이었다. 산이 있었다
푸르고 고요한 산이 있었다
그런데 문득
시간은 어디로 갔지?
나는 어디로 갔지?
그저 웃는다...

어느 날인지
하늘은 티없이 맑은데

오직
산이 있었다
고요한
푸른
높이 솟은
과묵한 산이 하나 있었다
산이...
(이수정·시인)


+ 등산의 즐거움

산에 오르는 즐거움은 인생살이처럼
정상에만 있지 않다
어떻게 느끼며 오르내리느냐에 있다
먼저 마음을 가다듬고 겸손하고 조용한 자세로
말馬을 올라타야 한다

앙상하게 드러난 뿌리를 밟을 때
나무의 신음소리를 들어보고
나무 하나 바위 하나를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살결에서 생명체를 인식한다

나무들이 내뿜은 신선한 공기를 통째로 들이마시며
다람쥐와 산새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좋아하는 그들의 느낌을 나눠본다

계곡물을 보며 핏줄에 흐르는 피를 느껴보고
산오름 바람을 맞아 콧구멍을 크게 벌린다
맨발로 흙을 딛고 서서 나도 나무가 되어 본다

고요한 산의 침묵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산꽃들과 눈을 맞대어 보고
산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산이 된다
이것이 산에서 만든 나의 행복이다.
(차영섭·시인)


+ 산을 오르며

우람한 산 앞에 서면
나의 존재는 얼마나 작은가!

겸허하게 살자고 다짐하면서도
가끔은 교만이 고개를 치켜드는

아직도 많이 설익은 나의 인생살이를
산은 말없이 가르쳐 주지.

높음과 깊음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

깊숙이 내려앉기 위해
가파르게 오르는 아름다운 삶의 길을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말없이 산은 내게 이야기하지.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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