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여행이 유행인 요즘, 목포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이훈동(李勳東) 정원'이다. 이 지역에 남아있는 최대 규모의 일본식 정원이라는 설명이 붙는다. 이훈동(1917~2010)은 조선내화 창업자인 이 지역 대표 기업인이다.
그의 호를 딴 '성옥(聲玉)기념관'을 들르게 된 것은 정원을 보려면 기념관을 먼저 관람해야 한다는 안내문 때문이었다. '시골 부자의 뻔한 기념관일 것'이란 예단은 틀린 것이었다.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부터 우리 근대 한국화 대표 화가의 수작이 한 공간에 어우러져 그야말로 눈 호사였다. 고암 이응로, 의재 허백련, 남농 허건, 운보 김기창,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이당 김은호, 제당 배렴, 심향 박승무 등 우리 화단 명인의 절정기 그림은 물론, 이 9인이 함께 그린 '9인 합작 화조도', 폭마다 각기 고수의 그림이 펼쳐지는 '10인 10폭 병풍'에 이르면 "대체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든다.
기념관에 청해 그의 자서전을 읽어봤다. 이훈동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열세살까지 서당 공부를 한 게 다였지만,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 한번 본 규수의 얼굴을 똑같이 그려내 '남의 딸 얼굴을 사진 찍어 걸어놨다'는 신고로 주재소에 끌려갈 정도였다고 한다. 사업으로 일가를 이룬 후, 그는 남도의 소리꾼, 화가들과 교유하면서 밥과 술을 대접하고 그림도 사줬다. 그림과 소리를 잘하고 좋아했던 그였지만 문화 생산자가 아닌 '문화 소비자'로 남아 작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좋은 작품이 있다면 먼 길 가길 꺼리지 않았던 간송 전형필 가문과 호암 이병철 가문뿐 아니라, 크게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숨은 소장가들이 지켜온 것이 우리 근현대 미술 100여년 역사다.
지금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명화를 만나다―한국 근현대 회화 100선'전시가 가능했던 것도 전국 각지의 '제2의 호암''또 다른 이훈동'같은 이들 덕이다. 국민들 두루 보라고 작품을 전시에 내놓은 이들은 대부분 '밥걱정'없이 산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모두 거창한 재력가는 아니다. 그림이 다락같이 오를 것이라 기대하고 산 경우보다는 "그냥 그 그림이 자꾸 생각이 나서" 몇 번이고 망설이다 산 사람들이다.
미술 학원으로 돈을 번 화가가 이런 말을 했다. "뭐가 크게 잘못됐다. 미술 학원 하는 나는 벤츠를 타지만, 정작 그림 그리는 사람은 밥 먹고 살기도 힘들다." 대학 입시라면 돈을 펑펑 써도, 그림 사는 데 돈을 쓰는 층이 매우 얇기 때문이다. 그림을 핑계 삼아 '돈 장난'친 기업인이 여럿 발각되면서 진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오해받는 세상이 됐다. 그러나 진짜 그림을 갖는, 보는 기쁨은 따로 있다. 이훈동의 자서전 중 한 대목이다.
〈어느 날, 목포 집에 한 처자가 찾아왔다. 자신을 허림(許林)의 딸이라고 했다. 허림은 한국화 대가 남농 허건의 동생으로, 일본 유학 중이던 1942년 스물다섯 나이로 요절한 인물이다. 찾아온 이유는 이랬다. "오늘 오후 3시에 제가 결혼합니다. 저는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뵙지 못했습니다. 회장님께서 아버지 그림을 소장하고 계시다기에 결혼 전 아버지 뵙듯 그림을 보고 싶어서…." 허림의 그림은 야트막한 야산을 개간한 밭 풍경이었다. 처녀는 반절지 크기의 그림을 오래도록 보다가 흐느껴 울었다. 그림을 결혼 선물로 주겠다는 내 말에 처녀는 "그 그림은 회장님이 갖고 계셔야 더 빛난다. 본 것으로 족하다"며 재빨리 집을 떠났다.〉
움켜쥐면 한 줌도 되지 않을 그림 한 장이 유복자(遺腹子) 처자에게는 본 적 없는 아버지의 숨결이자 살결이었다. 그림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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