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가을 야생화는 왜 보라색이 많을까 |
산 능선에 접어들자마자 곳곳에 보석을 박아놓은 듯했다. 청사초롱을 닮은 보라색 꽃, 금강초롱이었다. 줄기 끝부터 꽃이 아래로 피어 마치 진짜 보라색 초롱을 들고 있는 것 같다. 한두 송이가 아니라 눈길 닿는 곳마다 피었고, 아예 밭처럼 군락을 이룬 곳도 있다. 같은 통꽃 모양이지만 신비로운 보라색을 띤 것이 엷은 미색의 초롱꽃, 섬초롱꽃과는 확연히 다르다. 꽃을 들어 속을 들여다보니 세 갈래로 갈라진 암술이 수줍은 듯 흔들린다.
금강초롱은 경기도와 강원도 북부의 고산지대 숲에서 자라는 우리나라 특산 식물이다. 줄기를 따라 초롱처럼 생긴 보라색 꽃이 차례로 네 송이 정도 핀다. 1909년 금강산에서 처음으로 발견해 금강초롱이란 이름이 붙었다.
주말에 경기도 가평 화악산에 올라 귀한 금강초롱을 원 없이 보았다. 야생화 탐방은 이런 맛에 하는 것이다. 야생의 금강초롱은 10년 전쯤 점봉산 곰배령 가는 길에 처음 보았다. 그때는 희귀한 꽃을 보았다는 데 만족했는데, 이번에 자세히 보니 참 색이 곱다.
능선을 따라 좀 더 오르자 이번에는 투구꽃이 지천이다. 바깥쪽 꽃부터 차례로 연한 노란색에서 진한 보라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꽃을 보면 왜 투구꽃이라 부르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위쪽의 꽃잎이 로마 병사가 투구를 쓴 것처럼 꽃을 덮고 있다. 한 꽃대에 10여 송이까지 달려 있는 것이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듯하다. 투구꽃의 덩이뿌리는 옛날 사약의 재료로 쓰였을 만큼 독성이 강하다.
정상 근처에 이르자 이번에는 용담이 곳곳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역시 진한 보라색이다. 반음지를 좋아하는 금강초롱이나 투구꽃과 달리, 용담은 양지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보랏빛 꽃송이가 파란 가을 하늘과 잘 어울린다. 이 꽃은 웅담보다 뿌리의 쓴맛이 더 강하다고 하여 용담(龍膽)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초가을부터 늦게는 11월까지 피어 가을을 대표하는 야생화 중 하나다.
이처럼 가을 고산지대 야생화는 유난히 보라색이 많다. 야생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요즘 가을 산에 오르다 보면 보라색 꽃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화악산에서 찍어온 사진을 바둑판 모양으로 배열해 보니 보라색이 제일 많다. 요즘 벌개미취와 쑥부쟁이, 배초향도 연한 보라색을 뽐내고, 자주색과 보라색의 중간쯤인 물봉선과 고려엉겅퀴, 꽃향유도 흔히 볼 수 있다. 또 이 즈음 피는 꽃은 색이 아주 선명하고 깨끗한 것도 특징 중 하나다.
보라색은 빨강과 파랑의 중간색으로, 우아하면서도 신비감을 자아내는 색이다. 그래서 잘 소화하면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까다로운 색이라 자칫 잘못 사용하면 천박해 보이는 색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가을 야생화의 보라색은 진하면 진한 대로, 연하면 연한 대로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꽃의 제국'의 저자 강혜순 성신여대 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피는 꽃 3600여종 중 3000종의 색을 분석한 결과, 흰색이 32%로 가장 많았다. 이어 빨간색 24%, 노란색 21%, 녹색 8%, 파란색(보라색 포함) 7% 순이었고, 두 가지 이상 색으로 피는 꽃이 8%였다. 보라색을 포함한 파란색 꽃이 7%에 불과한데도 가을 산에는 유난히 보라색이 많은 것이다. 물론 가을 산에는 하얀 구절초도 한창이고, 좀 있으면 산국·감국 등 노란색 꽃도 필 것이다. 그렇더라도 전체적으로 보라색 꽃이 많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가을 야생화가 보라색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꽃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피는 것이 아니라 벌과 나비 등 꽃가루받이 매개자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차윤정이 쓴 책 '숲의 생활사'는 "가을은 곤충의 활동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가을 야생화는 곤충 눈에 잘 띄는 보라색 계통 색을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또 청명한 가을 빛에는 자외선이 많이 들어 있는데, 자외선은 안토시아닌 색소를 발달시켜 꽃색과 무늬가 더욱 선명하다고 했다.
강혜순 교수의 설명도 큰 틀에서는 비슷하다. 꽃의 색깔은 꽃가루받이 매개자와 깊은 관계가 있는데, 나비는 분홍이나 흰색 등 파스텔톤을, 벌은 노랑과 청색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가을철에는 나비보다는 벌이 주요 매개자이기 때문에 청색 계통의 보라색 꽃이 많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또 "벌은 빨간색에 둔감한 편이고, 대신 청색(보라색 포함)에 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며 "고산에는 매개자 수가 적기 때문에 꽃이 크고 화려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가을에 붉게 또는 노랗게 물드는 단풍 사이에서 벌의 눈에 쉽게 띄기 위해, 단풍과 대조적인 보라색을 택했을 것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도 있었다. 꽃이 환경에 적응해가는 과정이 보라색 빛깔만큼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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