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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王山의 藥水

라이프(life)/풍수지리

by 굴재사람 2013. 8. 26.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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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산청 王山의 藥水

 

 

지리산의 주맥은 동쪽으로 뻗어 내려갔다. 30대 때에는 시야가 좁아서 이 동쪽으로 뻗어 내려간 영봉(靈峰)들의 그 질서정연한 행렬과 아름다움을 몰랐다. 산세가 제각각이지 않고 방정하면서도 무게 있는 기운이 느껴진다. 인생살이 풍파를 겪고 시행착오를 거듭해야만 산세를 보는 안목도 생기는 것인가!

이슬비 오는 날 운무가 감싸고 있는 이 산청군 봉우리들을 보니까 남명 조식 선생이 왜 산천재(山天齋)를 지리산 동쪽에다가 잡았는지 이해가 간다. 지리산 동쪽 끝자락의 이름이 '왕산'(王山· 923m)이다. '천리행룡 일석지지(千里行龍 一席之地)'라고 했던가! '용이 천 리를 흘러가다가 마침내 명당 한 자리를 만든다'는 말이다. 금서면의 왕산이 바로 그런 끝자락에 있는 산이다. 이 왕산 자락에는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521~532)의 무덤이 있다. 가락국 10대 왕으로 즉위하여 12년간 왕으로 있었으며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나라를 넘겨주어야 했던 비운의 왕이다. 그런데 돌무더기를 쌓아 올려 만든 특이한 형태의 돌무덤인 것이다. "망국의 왕이 어찌 편하게 누워 있겠느냐, 내가 죽으면 돌무더기 속에 무덤을 써라"는 유언 때문이었다고 한다.

승자는 역사를 남기고 패자는 전설을 남긴다. 한이 크면 전설과 신화도 오래간다. 구형왕릉 위로는 날짐승이 똥을 싸지 않고, 가뭄이나 전염병이 들었을 때 왕릉에 기도를 하면 해결된다는 인근 주민들의 믿음이 그것이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구형왕의 증손자이다. 왕릉과 조금 떨어진 곳에는 김유신이 젊었을 때 활을 쏘던 사대(射臺)가 있다. 가야 후손이 겪어야 했던 지역 차별의 울분을 할아버지 묘 옆에서 활을 쏘며 달랬던 것이다.

왕산의 정기는 산 중턱에 있는 샘물에 있었다. 허준의 스승이었던 전설적인 명의 유의태(柳義泰)가 환자를 치료할 때 사용했다는 약수이다. 위장병에 좋다고 소문이 나 있다. 죽염으로 유명했던 인산 김일훈 선생도 생전에 이 약수를 여러 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도 전국을 다니면서 내노라하는 약수를 삼켜 보았지만, 이 유의태 약수는 세 바가지를 들이켜도 조금 지나면 더 먹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샘물이었다. 혹시 구형왕이 죽어서 후손에게 남긴 선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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