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감출수록 드러나는 자리에 서다
해인사 홍류동천(紅流洞天) 십리길을 천천히 걸었다. 감추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면서 길은 이어졌다. 그 옛날 소달구지가 다니던 시절에는 감추어진 길이었다. 하지만 신작로가 되면서 '드러난' 길로 바뀌었다. 차를 이용할 때마다 스쳐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길이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걷기 열풍이 일면서 찻길 건너편으로 걷는 길이 새로 생겼다. 올레길이니 둘레길이니 하면서 지역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걷는 길이 유행처럼 만들어질 무렵 '홍류동길'도 '소리길'이 된 것이다. 눈이 맑았던 시절에는 봄 진달래 가을 단풍을 감상하며 '홍류(紅流)'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리길은 눈은 물론 귀까지 호사롭기를 원했다. 그래서 물소리 바람 소리가 함께하는 길이라는 의미까지 살렸다.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면서 눈과 귀를 동시에 만족하게 하는 아름다운 이름의 명품길이 다시 탄생한 것이다.
아웃도어 시장의 세계적 강국(?)답게 형형색색의 등산복은 홍류동길과 조화를 이루었고, 아줌마들의 수다와 선남선녀의 속삭임 그리고 어린이들의 재잘거림은 소리길과 잘 어울렸다. 당장 출발해도 히말라야를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복장으로 중무장한 채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고, 소리마저 거부하는 중년 남성의 침묵을 뒤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중간 지점인 농산정(籠山亭)에 이르렀다. 신라 말기에 은둔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감춰지길 희망했던 고운(孤雲) 최치원(857~?) 선생이 칩거한 곳이다.
'주역'에는 "천지의 기운이 막히면 현인들은 숨는다(天地閉 賢人隱)"고 했다. 속마음은 세상이 꼴 보기 싫어 숨지만 밖으로는 천지의 기운이 막힌 까닭에 은거할 수밖에 없다는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그런 의미로도 고전은 참으로 좋은 책이다. 뒷날 은둔을 소극적인 '이은(吏隱)'과 적극적인 '야은(野隱)'으로 나누는 이론까지 등장했다. 그는 육두품 출신이란 신분적 한계를 절감한 나머지 처음에는 이은을 선택했다. 중앙의 화려한 벼슬자리를 마다하고 변방의 미관말직을 전전했다. 갈수록 기울어지는 국운은 급기야 하늘과 땅의 기운마저 멈추게 했다. 결국 초야에 묻혀 사는 야은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구원의 길을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어디든지 숨구멍은 있기 마련이다. 해인사에 머물고 있는 형인 현준(賢俊) 대사가 든든한 의지처였다. 여러 은둔처를 찾다가 마침내 이 자리로 낙점한 것은 형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형의 도반(道伴)이었던 정현(定玄) 스님과도 도담(道談)을 나눌 만한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이후에도 이곳을 찾는 은둔객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바위에는 애써 흔적을 드러내고자 하는 덜 떨어진 이들의 이름 석 자가 곳곳에 새겨졌다. 농산정 인근 맞은편 언덕에는 지금도 '짧은 은둔'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몇 채의 기와집이 '민박' 간판을 달고 있다. '정감록'은 이 지역을 피신하기 좋은 십승지(十勝地)에 포함했다. 세계문화유산이 된 팔만대장경이 육백여년 전 해인사로 옮겨진 것도 결국 자연재해가 미치지 않는 명당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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