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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글모음(writings)/좋은 시

by 굴재사람 2012. 11. 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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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에 생각나는 사람


풋감 떨어진 자리에 바람이 머물면
가지 위, 고추잠자리 댕강댕강 외줄타기 시작하고
햇살 앉은 벚나무 잎사귀
노을 빛으로 가을이 익어갈 때

그리운 사람, 그 이름조차도 차마
소리내어 불러볼 수 없는 적막의 고요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지
오지 못할 그 사람 생각을 하면

(최원정·시인)






시월에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문태준·시인, 1970-)






10월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오세영·시인, 1942-)






10월은


시월은
내 고향이다

문을 열면
황토빛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시는 어머니

하늘엔
국화꽃 같은 구름
국화향 가득한 바람이 불고

시월은
내 그리움이다

시린 햇살 닮은 모습으로
먼 곳의 기차를 탄 얼굴
마음밭을 서성이다
생각의 갈피마다 안주하는

시월은
언제나 행복을 꿈꾸는 내 고향이다.

(박현자·시인, 경기도 양평 출생)






시월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너의 잎새들은 곱게 단풍이 들어 곧 떨어질 듯하구나
만일 내일의 바람이 매섭다면
너의 잎새는 모두 떨어지고 말겠지

까마귀들이 숲에서 울고
내일이면 무리 지어 날아가겠지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오늘은 천천히 전개하여라
하루가 덜 짧아 보이도록 하라
속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을
마음껏 속여 보아라

새벽에 한 잎
정오에 한 잎씩 떨어뜨려라
한 잎은 이 나무, 한 잎은 저 나무에서

자욱한 안개로 해돋이를 늦추고
이 땅을 자줏빛으로 흘리게 하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미 서리에 말라버린 포도나무 잎새를 위해서라도
주렁주렁한 포도송이 상하지 않게
담을 따라 열린 포도송이를 위해서라도

(로버트 프로스트·미국 시인, 1874-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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