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의 길 위에서] 강원도 인제 자작나무 숲, 순백 裸身으로 비탈에 서다
늦가을 숲은 황량하다. 잎 다 떨어뜨린 나무들은 우중충한 잿빛이다. 그 휑한 비탈을 정령(精靈)처럼 밝히는 나무가 있다. 가을 다 보내고 이맘때가 돼야 비로소 하얗게 빛나는 나무가 있다.
'나목(裸木)'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나무. 겨울로 갈수록 수피(樹皮)가 하얗다 못해 은빛을 발하는 나무. 누군가 "나무 중에 가장 수줍고 귀부인다운"이라고 노래했던 나무. 추위 속에서 더욱 맑아지는 인고(忍苦)와 침묵의 나무, 자작나무다.
며칠 전 강원도 인제군 남면 수산리 매봉 자락을 찾았다. 44번 국도에서 양구 가는 46번 국도로 잠깐 벗어나 '수산리' 표지판 보고 한참을 들어가는 막다른 산중(山中)이다. 10월 하순 다녀온 지 보름 만에 다시 이 산골짝에 든 건 순전히 자작나무 숲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북국(北國)에서 온 겨울나무들이 깊어가는 계절과 함께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가는지 보고 싶었다.
높이 800m 되는 매봉의 어깨쯤을 임도(林道)가 꼬불꼬불 휘감고 간다. 그 길 따라 10㎞ 한 바퀴를 천천히 차로 돌았다. 눈 닿는 곳마다 자작나무다. 보름 전 매달고 있던 노랑 잎들이 주변 단풍과 어우러져 알록달록 몸뻬바지 같던 풍경은 그새 무채색이 됐다. 잎을 모두 벗은 자작나무들은 잘 발라낸 생선 뼈처럼 새하얀 줄기를 드러냈다. 산등성이가 온통 흰 물감으로 그어댄 펜화(畵) 같다. 아니 자작나무들은 날카로운 펜 그 자체로 무수히 꽂혀 있다.
자작나무는 한반도에선 개마고원쯤에나 자라는 추운 나라 수종(樹種)이다. 언젠가 백두산 가는 길, 눈밭에서조차 환하게 빛나던 그 숲도 자작나무였다. 북방 사람들은 자작나무로 집을 짓고 불을 땠다. 죽은 이를 자작나무 껍질로 감싸 떠나 보냈다. 자작나무는 겉은 희지만 속은 기름을 잔뜩 머금어 검다. 기름기 때문에 '자작자작' 소리 내며 잘 탄다고 해서 자작나무다. 한자 이름은 '흴 백(白)' 자를 써서 백화(白樺), 백단(白�b)이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 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백석 '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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