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들면 누구나 너그러워진다는 것쯤은 다녀본 이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겠지요. 성냥갑 같은 도시의 아파트에서 살며 이웃과 인사 한번 나누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희한하게도 산에만 가면 영판 달라집니다.
마주 오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쯤은 예사고, 힘들여 지고온 먹을거리까지도 낯모르는 이들과 기꺼이 나눕니다. 낯선 이들이라면 경계부터 하고 보는, 산 아래 일상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릅니다. 되도록 멀고, 산이 크고 깊을수록 이런 현상은 두드러집니다. 도대체 산은 어떻게 사람을 바꿔놓는 것일까요.
언젠가 설악산을 오를 때의 일입니다. 길고긴 산행 중에서 짐을 나눠 지고 간 일행과 헤어지게 됐습니다. 물이며 최소한의 기본적인 행동식 정도는 각자 지참해야 했었는데, 깜빡 잊고 물과 음식을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지고 가게 됐습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그만 부주의로 서로를 발견하지 못하고 흩어지게 됐습니다. 물과 음식을 지고 간 그가 앞서간 것으로 믿었던 터라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정작 뒤처진 그는 일행이 뒤에 있겠거니 하고 속도를 늦췄습니다. 그러니 서로 점점 멀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 뒤부터 물 한방울과 사탕 한 알의 행동식도 없이 고된 산행을 해야 했습니다. 음식을 지고 간 이가 앞서 간 것으로 믿고, 따라잡겠다며 잰걸음으로 산을 타니 땀은 비오듯 흘렀고 입은 바짝바짝 타들어갔습니다.
되돌아가야 하나 싶어 걱정이 태산같았지만, 산중에서 만난 등산객들은 기꺼이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오이며 토마토를 건네기도 했고, 인절미를 꺼내놓기도 했습니다. 사탕을 한줌씩 쥐여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급한 것은 물이었습니다. 등산 예절의 첫 번째가 ‘위급상황이 아니면 물은 얻어 마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은 생명줄이면서 가장 무거운 짐 중의 하나라 누구든 필요한 양만을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낯 모르는 이에게 어렵사리 사정 얘기를 하며 물을 나눠달라고 청했을 때, 그는 기꺼이 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길은 아직 멀었고, 그의 물통도 거의 바닥이 나 있었지만 기꺼이 그 물을 나눠 주었던 것이지요. 어찌나 고맙던지요.
그렇게 ‘구걸’하다시피 산행을 해서 산장에 들었고, 그곳에서 뒤늦게 올라오던 일행과 반갑게 조우할 수 있었습니다.
산에 들면 누구나 너그러워지는 까닭은 그곳에서는 지위나 소유에 관계없이 평등하고 공정한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산을 내려온 뒤에도 산에서 보여준 품성을 그대로 지니고 사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낯선 이들과도 반갑게 눈인사를 나누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과 기꺼이 제 것을 나누는 모습을 말입니다.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다른 이들을 앞서 가기 위해 추월이나 새치기를 일삼고, 자신과 똑같은 짓을 하는 운전자들에게는 마음 속으로 거친 욕설을 퍼부어댈 것임을 알면서도, 또다시 성냥갑같은 아파트로 돌아가 이웃과 담을 쌓고 살 것임을 알면서도, 산에서 보여준 따뜻한 모습이 ‘이 땅의 사람들이 가진 본성’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1-06-08 14:15
산에 오르겠다고 철썩같이 다짐해 놓고도, 다음날 아침 일어나면 마음이 바뀔 이유가 한 다섯개 쯤 된다. 여름철이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난다. 겨우 겨우 마음을 다잡고 끙끙거리며 능선에 오르고 나면 결단을 내린 것이 잘했다는 이유도 열개쯤은 된다. 5대10.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봄과 가을엔 일주일이 멀다하고 산을 찾지만, 여름철이 되면 몸이 축 늘어지면서 뜸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여름철 산행도 봄, 가을에 못하지 않다. 봄이 꽃이고 가을이 단풍이라면 여름엔 푸르른 녹음이 기다려준다.
지난 주와 이번 주말 산을 걸으면서 여름철 산행이 좋은 몇가지 이유를 생각해봤다.
첫째는 한바가지 땀을 흘릴 수 있어 좋다.
오늘 전주는 33도, 서울은 29도까지 올랐다고 한다. 올해들어 처음으로 오존주의보까지 내렸다는 소식이다. 한여름이다. 여름엔 당연히 덥다. 이런날 비탈길 몇걸음만 옮기면 이마에 땀이 송긋히 흐른다. 산 정상 턱밑쯤에 다다르면 얼굴엔 거의 뜨거운 소나기가 내린다. 과체중 다이어트에도 당연히 보약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술과 담배로 찌든 노폐물들을 깨끗이 털어내는데 이만한 것이 또 있을까.
둘째로 청량한 녹음이 좋다.
성하기(盛夏期)의 산중(山中)에는 녹음으로 충만하다. 이젠 한국의 산도 나무가 울창해져 산 초입부터 능선까지 햇볕 한자락 받지 않고 오를 수 있는 산들이 많아졌다. 땡볕 내리쬐는 아스팔트, 시멘트 숲에서 벗어나 녹음속으로 텀벙 뛰어들어 초록의 조각들이 내뿜는 청량한 산소를 마시며 걷는 맛은 여름철 산행이 주는 특별한 기쁨이다.
셋째는 번잡스럽지 않아 좋다.
봄과 가을엔 산중에도 인파가 시장터처럼 붐비는 요즘이다. 그러나 여름철에는 강과 바다 등 물가를 찾아 떠난 사람들, 게으른 사람들의 빈자리로 호젓한 산을 만나기 쉽다. 몸과 몸이 부딪히고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부딪히는 봄철과 가을철의 번잡함이 없는 한가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여름산행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마지막으로 계곡의 시원한 물, 능선에 부는 바람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여름산행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는 달아오른 열기를 시원한 계곡물과 능선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식힐 때 느끼는 쾌감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모든 시름이 이 한순간에 다 씻겨나간다.
여름 산행은 이런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한다. 그리고 그 뒤를 기다리는 달콤하고도 깊이 빠져드는 잠. 장마 오기 전에 또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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