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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끼리 모여 산다

글모음(writings)/좋은 시

by 굴재사람 2010. 10. 27.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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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를 알아 주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고향사람들이다.
그 영혼의 고향사람들이다.
나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찌 나의 시를 알아 주리.
특히 그 죽음의 철학을. 그 인생의 애련을.





    낙엽끼리 모여 산다 - 조병화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조병화,『하루만의 위안』



이 작품은 나의 시집 『하루만의 위안』의 중심이 되는 내용이라 하겠다.
나의 도서관 이층 방은 수목들에 둘러싸여 봄이면 꽃송이 바다에, 내가 둥둥 떠서 잠이 들고 잠이 깨고 하는 것 같고, 가을이면 무수한 낙엽의 바다 위에, 내가 뭉쳐 떠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어느 서리가 내리던 아침,
잠에서 깨어 이 무수한 낙엽들 속에서 낙엽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를 발견하고, 나 아닌 무수한 나를 발견하고, 내 이웃 내 이웃의 이웃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이미지가 이 시의 골격이었다.

우리들 모두 낙엽 같은 인생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낙엽이 지닌 소중한 생명과 그 존재 이유와 낙엽이 아니면 가지지 못하는 구수한 인간적인 사상. 이러한 실존적인 인간 가족, 인간 부락, 인간 세계-이러한 것을 생각했다.

낙엽이 청정 푸른 잎사귀가 될라 해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고,
낙엽이 낙엽이 아닌 다른 모습을 모방하고 발버둥쳐대야 이것도 우스운 일이고, 낙엽은 낙엽끼리 모여 낙엽답게 낙엽처럼 살 때 낙엽으로서의 강한 정과 생명을 지니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 시로써 나는 나의 세계가 이웃으로 이웃에서 이웃으로 번져 나가야 하는 하나의 방향 선을 발견했다.

여기서 낙엽을 우리들의 여러 모의 모습으로 바꾸어 보면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소리 없는 우정을 독자는 느끼게 될 것이다.


조병화,『고백』, 오상, p.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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