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半술잔

라이프(life)/술

by 굴재사람 2010. 8. 10.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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半술잔

 

 

김회평 논설위원

술맛을 최종 완성하는 건 술잔이다. 술은 궁합이 맞는 잔에 마셔야 특유의 풍미가 온전히 살아난다. 와인·샴페인·위스키·맥주·막걸리 잔이 그래서 각양각색이다. 술과 잔의 잘못된 만남은 비극적이다. 투박한 잔에 담긴 와인, 병원 상가의 ‘종이컵 맥주’를 떠올려보라.

술은 채워야 맛이다. 오랜 전통의 세계 맥주 명가들은 제각기 다른 잔을 만들어 낸다. 기네스 잔은 완만한 곡선이 단아하고, 칼스버그 잔은 긴 나팔처럼 날렵하고, 호가든 잔은 탱크처럼 단단하고, 레페 잔은 수도원 출신답게 성배(聖杯) 모양이고, 듀벨 잔은 튤립형이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자사 맥주가 최적의 맛을 내도록 고안한 형태다. 시판되는 330㎖ 병맥주는 이들 잔을 거품과 함께 한치 오차도 없이 가득 채운다. 개성 없는 잔으로 홀짝거릴 수밖에 없는 국산 맥주 소비자는 사실 억울하다.

술잔을 가득 채우지 않는 게 때론 미덕이 된다. 동아시아권에는 계영배(戒盈杯)의 금도가 전해져 내려온다. 술을 70%까지만 채울 수 있도록 절묘하게 고안된 잔이다. 흘러넘침을 경계하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철학이 들어있다. 최인호 소설 ‘상도(商道)’에 조선 거상 임상옥이 계영배를 통해 진정한 부(富)의 경지를 깨우치는 장면이 나온다. 최근 여야 승패가 엇갈린 지방선거·재보선의 결과도 그랬다. 과욕·자만은 파국을 부른다.

절주(絶酒)잔으로서 계영배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소주잔의 절반을 유리로 채운 ‘2분의 1잔’ 2만4000개를 만들어 대학가 주변 술집 등에 보급했다고 한다. 반(半)술잔이 자연스럽게 음주량을 줄일 거라고 믿는 모양이다. 음주로 인한 국내 사회경제적 비용이 국내총생산(GDP)의 3%에 육박한 상황은 물론 심각하다. 몇 년 전 원주시가 소주잔의 3분의 1 크기 절주잔을 보급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들 절주잔은 계영배의 ‘여백’을 원천봉쇄한다.

관심은 그 효과 여부다. 주량은 통상 잔이 아닌 병으로 가늠한다. 평소 소주 반 병이나 한 병을 마시던 사람이 잔이 작아진다고 덜 마실까. 다이어트한다고 숟가락을 티스푼으로 바꾸는 격이다. 일종의 원인 오판의 오류다. 진짜 문제는 술을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더 마시게 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잔돌리기 관행을 없애는 데 집중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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