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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 진정한 술꾼 시인 박정만

글모음(writings)/좋은 시

by 굴재사람 2010. 5. 1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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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 박정만 (1946 ~ 1988년)



      나는 네 눈동자속에서 살고싶어
      네 눈이 보는 것을 나도 보고
      네 눈에 흐르는 눈물로 나도 흐르고 싶어
      어쩌다 웃고도 싶어
      밤이면 네 눈속에 뜨는 별처럼
      나도 네 눈속에서 별로 뜨고 싶어

      간혹 꿈도 꾸고 싶어
      네 눈속에 꿈꾸는 길이 있으면
      나도 네 눈속에서 꿈꾸는 길이 되고 싶어
      끝없이 걸어가는 길이 되고 싶어

      어쩌면 그 길에서 나그네도 보겠지
      그러면 나도 네 눈속에서
      먼길을 가는 나그네가 되고 싶어
      풀밭에 주저앉아 가끔가끔 쉬어도 가는

      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네 눈이 가리키는 방향을 나도 보고
      네 마음의 풍향계도 바라보고 싶어
      저기, 키 큰 미류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군

      네 눈속에는 바람이 지나고 있어
      나도 네 눈속을 지나는 바람이고 싶어
      네가 보는 것을 나도 볼수 있지
      왜냐하면 나는 네 눈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네 눈속에는 멧새가 살고 있어
      갓 움이 돋은 고란초도 살고 있어
      그날은 비 갠 오후 저녁 때
      네 눈동자 속에는 무지개가 걸려있었지

      나도 네 눈동자 속에서 무지개로 내리고 싶어
      그리하여
      네 가장 아름다운 젖무덤에
      어린 양처럼 유순한 코를 박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잎의 모습으로 죽고 싶어

      나는 끝끝내 네 눈동자속에서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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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술꾼이었던 詩人 박정만


1987년 여름... 두 달동안 오백병의 소주를 마시고, 삼백편의 시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詩人 박정만!!! 나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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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고려원의 편집장이었던 시인 박정만 등 7명이 보안사로 끌려갔고, 며칠간 무자비한 취조와 구타, 고문을 당한 뒤 풀려났다. 박정만은 고문 후유증과 인간에 대한 절망감을 폭음으로 달래다가 1988년 10월 사망했다.

시인 박정만은 죽기 서너 달 전부터 곡기를 끊고 하루도 쉬지 않고 소주를 마셨다. 술의 명정 상태에서 깨고 나면 몸도 마음도 괴로우니까, 다시 취하기 위해 몸 속에 소주를 들이부었다. 그는 명정 상태에서 수백 편의 시를 쏟아냈다. 그가 스무 해 동안 썼던 시보다 죽기 직전의 두세 달 동안 썼던 시의 양이 더 많았다.

박정만은 취기에서 취기로 이어지는 황홀경 속에서 시의 영감을 구하고, 접신의 경지에서 폭발적으로 시를 쏟아냈다. 그는 시의 끝머리에 시를 쓴 날짜와 시간을 적어 넣었는데, 어떤 시들은 불과 일,이 분의 간격을 두고 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괴로웠겠지만, 아마도 영혼의 마지막 불꽃을 소진시켜가며 시를 한 편 한 편 토해낸 그 자신은 누구보다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1987년 한 해 동안 박정만은 1천병 이상의 소주를 마셨다고 했다. 최소한 하루에 3병꼴인 셈이다. 빈 소주병을 치우지 않고 조그마한 마당에 늘어놓으니 그 모습이 장관이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피크는 아마도 그 해 여름이었던 것 같다.

그 무렵 기형도가 중앙일보에 쓴 기사를 보면 무더위가 한창이던 20여 일 동안 소주만 1백병 이상을 마시며 무려 3백여 편의 시를 썼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박정만에게 있어서 술이란 시를 나오게 하는 어떤 묘약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박정만의 술 이야기를 기사로 쓰고, 박정만이 죽은 지 약 5개월 후인 늦겨울의 어느 날 새벽, 낙원동의 허름한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 기형도 시인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맥주 한 병쯤이 정량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형도 역시 술만 마셨다 하면 변화가 빨리 온다.

평소에는 늘 어둡고 쓸쓸하고 어딘가 공허한 표정이지만 술만 들어가면 얼굴이 밝아지고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라고 권하면 서슴없이 뛰어난 솜씨로 노래를 불러제치곤 했다. 남보다 10분의 1의 술을 마시고도 10배의 효과를 낸 셈이었으니 경제적인 술꾼이었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역설적으로 말해서 박정만 말년의 좋은 시들은 모두 술의 힘을 빌어 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설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박정만을 죽게 한 것은 술이 분명하지 않느냐고 입을 모은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술 때문에 죽었다고 보는 시인은 박정만 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1960년대 이후만 하더라도 김관식, 조지훈 시인을 비롯해서 천상병, 조태일, 김광협 같은 시인들도 모두 술 때문에 수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고 믿고 있다.



[시인세계 / 문학세계사 /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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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새 / 오월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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