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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소화가 필요 없는 음식

라이프(life)/술

by 굴재사람 2009. 8. 12.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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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은 소화가 필요 없는 음식



▲ 술빚는 장면


아마도 ‘술’이란 말은 ‘술술’ 잘 넘어간다고 붙은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술은 밥이나 고기같이 애써 씹을 필요가 없고, 창자에서 따로 힘들여 소화시킬 이유도 없다.(소화시키는 데도 많은 에너지가 든다.) 술은 닭 물 마시듯 고개를 치켜들어 붓기만 하면 된다. 술은 포도당보다 훨씬 작은 분자(分子)로 잘려져서 세포에 스르르 스며들어 곧바로 열과 힘을 내니 세상에 이리 좋은 음식이 어디 있담! 누가 뭐래도 술은 마시는 음식이다.

술은 모르는 사람 사이에 걸쇠를 걸어주고, 마음에 묻혀있던 진심(眞心)을 저절로 노출(露出)시키며 팽팽했던 넋의 끈을 느슨케 한다. 고인 마음을 흐르게 하고 숨은 얼을 일깨워 되새기게 하며, 가끔은 색(色)을 매개하기도 한다. 또 ‘술은 가장 부작용이 적은 약’이라고 ‘약전(藥典)’에 버젓이 쓰여 있다. 허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술도 과하면 까탈을 부린다.

옛날에 내 어릴 때 우리 집에서도 자주 술을 담갔다. 찹쌀이나 멥쌀을 시루에 찐 것이 지에밥(고두밥)이요, 하도 꼬들꼬들하여 맨손으로 주워 먹어도 쌀알이 손끝에 달라붙지 않는다. 그 놈 얻어먹는 재미라니! 아니다, 엄마 몰래 슬쩍슬쩍 걷어다 먹었다. 밥이 식으면 누룩(밀을 굵게 갈아 띄움)과 버무려 깨끗이 소독한 독에 넣고 아랫목에다 곱게 모시고는 담요나 홑이불로 둘둘 말아둔다. 한 이틀 지나면 독 안에 불이 붙는다.

작은 분화구(噴火口)가 여기저기 부글부글 터지면서 뽀글뽀글 거품(이산화탄소)을 튀긴다. ‘난데없이 물에 불이 붙었다’하여 술을 ‘수불’이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술이 괴는 것이다. 얼마 뒤에는 술독이 식고 굄도 잠잠해지면서 술이 가라앉으니 이제는 청주를 떠도 된다.

여기까지를 다시 보자. 고두밥은 다름 아닌 녹말 덩어리다. 누룩에 들어있는 누룩곰팡이(자낭균)가 다당류(多糖類)인 녹말을 이당류(二糖類)인 맥아당(엿당)으로, 그것을 다시 분해하여 아주 간단하고 흡수 가능한 단당류(單糖類)인 포도당으로 분해한다.(그래서 덜 된 술은 단맛을 낸다.) 술독의 녹말의 분해는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소화(가수분해) 과정과 똑같다. 누룩에는 누룩곰팡이 말고도 흔히 ‘술약’이라 부르는 효모(酵母·yeast)도 그득 들어있다.

‘발효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효모가 누룩곰팡이가 분해해 둔 포도당을 더 작은 물질인 술(에틸알코올)로 잘라나간다(알코올 발효). 그렇다. 술이란 누룩곰팡이의 가수분해와 효모의 발효과정의 산물이다. 고맙기 그지없는 곰팡이들, 그들 덕에 술 맛을 보다니! 마시기만 하면 당장 에너지를 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절대로 술은 ‘도깨비 오줌’이 아니다. 주신(酒神) 바커스(Bacchus)가 준 감로수(甘露水)임을 알자.  

여기에 더 끈을 달면, 푹 익은 술독 안에 때 탄 용수(싸리나 대로 얽어 만든 둥글고 긴 통)를 박으니 술이 안으로 비집고 스며들어온다. 이 맑은 국물이 청주(淸酒)요, 약주(藥酒)다. 그리고 건더기에 물을 조금 섞어 팍팍 치대어 국물을 뽑아내니 그것이 막 거른 ‘막걸리’요, 이것을 소주고리에서 증류한 것이 소주다. 아~, 군침이 도누나! 그러나 제발 과음은 삼가시라. 고산 윤선도께서 “술을 먹으려니와 덕 없으면 문란하고/ 춤을 추려니와 예 없으면 난잡하니/ 아마도 덕예(德禮)를 지키면 만수무강하리라”라 하셨으니….

글 : 권오길 (강원대학교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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