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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경묘(濬慶墓)

라이프(life)/풍수지리

by 굴재사람 2008. 12. 1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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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준경묘(濬慶墓)

 

 

숭례문 복원에 사용되는 소나무는 강원도 삼척에 있는 준경묘에서 벌채되었다.

준경묘는 조선 왕조의 성지로서 특별하게 보호받던 지역이었으므로

오래된 소나무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지였으므로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서 나무를 벨 수 없는 조선왕실의 성역이었다.

두타산(頭陀山) 자락에 자리 잡은 준경묘는 천하 대명당 자리라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전주 이씨들은 이 묏자리 발복 덕택에 후손인 이성계가 새 왕조를 창업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준경묘 자리는 맹호출림(猛虎出林)의 형국이다.

그런데 왜 강원도 외진 땅에 이성계의 5대조 묘가 자리 잡게 된 것인가?

원래 이성계의 선조들인 전주 이씨들은 대대로 전주에서 살았다.

전주 이씨 시조인 신라시대 이한(李翰·이성계 21대조)의 묘역인 조경단(肇慶壇)은 전주시 덕진동에 있다.

이성계의 4대조(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는 고려 후기에 전주 호족이었다.

필자에게 전국의 풍수설화를 많이 알려준 김성수(73) 선생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4대조인 이안사는 아주 아끼던 기생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전주의 관기였다.

고려 고종 18년(1231년)에 전주에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새로 부임해 왔다.

전주의 호족들이 모여 새로운 별감 부임을 축하하는 술자리가 벌어졌고,

이 술자리에서 이안사가 아끼던 기생의 미모와 춤 솜씨를 보고 별감이 욕심을 냈다.

"내놔라!" "어림없는 소리, 못 내놓는다!"

결국 이안사와 별감이 한판 붙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안사는 전주를 떠나야만 하였다.

이안사가 전주에서 인심을 얻은 덕에 그를 따라가겠다는 백성이 170호나 되었다고 전해진다.

경상도 내륙을 거쳐 삼척에 도착했고, 오십천을 거슬러 골짜기로 들어가 활기리에 정착했다.

얼마 되지 않아 부친인 이양무(5대조)가 죽었고,

부친 묏자리를 찾다가 마침내 발견한 자리가 바로 이 준경묘 자리이다.

이안사의 꿈에 노승이 나타나 "이 자리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왕이 나온다"는 계시를 받고

쓴 자리라고 전해진다('명당에서 인물 난다' 128쪽).

나중에 왕이 된 이성계에게까지 이 전설이 전해진 것 같다.

결국 이 전설 때문에 오늘날까지 소나무가 보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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