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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시의 풍정

라이프(life)/술

by 굴재사람 2008. 8. 13.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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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詩의 風情





선조 때 시인 권필은 과거 응시를 권유하는 벗의 편지를 받고 보낸 답장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내게는 고서 여러 권이 있어 홀로 즐기기에 족하고,
시는 비록 졸렬하지만 마음을 풀기에 족하며,
집이 비록 가난해도 또한 막걸리를 댈만은 하니,
매양 술잔 잡고 시를 읊조릴 때면
유연히 스스로 얻어 장차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오.
저 이러쿵 저러쿵 하는 자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리요.

戱題(희제)란 시에서는,

詩能遣悶時拈筆 酒爲요胸屢擧광 
시능견민시념필 주위요흉루거광

시는 고민 걷어가 때로 붓을 잡았고
술은 가슴 적셔줘 자주 잔을 들었지.

라고 하여 시와 술로 밖에는 풀길 없는 뜻같지 않은 세상에서의 갈등을 씁쓸히 노래하고 있다.

또 이수광은 〈술회〉란 작품에서,


詩似巧工雕萬物 酒爲長추掃千愁
시사교공조만물 주위장추소천수

시는 교묘한 솜씨로 만물 아로새기고
술은 빗자루 되어 온갖 근심 쓸어가네.

라고 노래한 바 있다. 가슴 속에는 활활 타오르는 정염이 있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지울길 없는 근심이 있다. 시가 있어 이를 노래하고, 한잔 술이 빗자루 되어 그 근심을 깨끗이 쓸어내매, 마음 속에는 어느새 호연한 기상이 솟아난다.

술은 언제 나고 시름은 언제 난지
술나고 시름난지 시름 난 후 술이 난지
아마도 술이 난 후에 시름 난가 하노라

술과 시름은 동무 삼아 다닌다. 시름 때문에 술을 마시는가, 술 때문에 시름이 생기는가? 시름이 있으니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다 보면 시름은 간데 없다. 술만 있고 시름이 없다면, 시름만 있고 술이 없다면 세상은 아무 살 재미가 없지 않겠는가?

술을 취케 먹고 두렷이 앉았으니
억만 시름이 가노라 하직한다
아희야 잔 가득 부어라 시름 전송 하리라. / 정태화(鄭太和)

상쾌하지 않은가. 허리를 곧추 세우고 도연히 앉았노라니, 가슴 속에 숨었던 시름이란 놈들이 일제히 그 앞에 무릎을 꿇고서, `이제 물러 가렵니다` 하며 하직을 고해 온다. 내게 왔던 손님이니 그냥 보낼 수야 있나. 넘치는 한 잔 술로 가는 시름을 전송하련다.

또 이런 시는 어떨까.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을 부르시소
초당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를 청하옴세
백년간 시름 없을 일을 의논코저 하노라. / 김육(金堉)

술이 굼실 익으면 술 익었다 벗을 청하고, 꽃 피어 향기 흐르자 또 그 핑계로 동무를 부른다. 만나서 하는 얘기는 무슨 얘긴가? 더도 덜도 말고 딱 `백년간` 시름 없을 일을 의논코저 함이다.

시 있는 곳에 술이 있고 술 있는 곳에 노래가 있다. 더욱이 세상일은 언제나 공정치 아니하고, 시비는 늘 전도되며, 정의는 불의 앞에 항상 좌절을 경험하기 마련임에랴.

주선(酒仙) 이백은 일찍이


抽刀斷水水更流 擧杯消愁愁更愁
추도단수수경류 거배소수수경수

칼 빼어 물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
잔 들어 시름 달래도 시름은 더 깊어지네.

라 하여 늘 지니고 가는 가눌 길 없는 삶의 근심을 노래한 바 있다. 가뜩이나 쓴 인생에 한 잔 술이 없대서야 무슨 낙이 있겠는가.

滌蕩千古愁 留連百壺飮 척탕촌고수 류련백호음
皓月未能寢 良宵宜淸談 호월미능침 량소의청담
醉來臥空山 天地卽衾枕 취래와공산 천지직금침 / 李白 〈友人會宿〉

천고의 이 시름 씻어내고자 연거퍼 백병의 술을 마신다.
좋은 밤 소곤소곤 청담 나누며 두둥실 흰 달에 잠 못 이룬다.
거나해 공산에 드러누우면 천지가 그대로 이부자린걸.

백병의 술로도 씻어낼 수 없는 근심이 있다. 천고의 근심을 씻자고 마시는 술이니 목전의 상황에 얽매여 일희일비하는 소인배의 근심은 아니다. 우주를 품어안고 천고를 가늠하는 위대한 고독자의 근심이다. 어느덧 흰달은 동산 위로 두둥실 떠올라 어둡기만 하던 자리를 구석구석 비춰준다. 거나해 그대로 드러 누우면 드넓은 우주가 마치 포근한 솜이불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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