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 사이
詩人 / 李生珍 (1929~ )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지난 2019년 봄
평사리 최참판 댁 행랑채 마당에서
박경리 문학관 주최로 제1회 "섬진강에
벚꽃 피면 전국 시(詩) 낭송대회"가 열렸습니다.
6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낭송시가
바로 이생진(李生珍) 시인의 이 작품입니다.
7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 낭송가의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실려 낭송된 이 시는
청중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였습니다.
좋은 낭송은 시 속의 ‘나’ 와
낭송하는 ‘나’ 와
그것을 듣고있는 ‘나’ 를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주인인 기억이 하나 둘
나를 빠져 나가서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
나는 창문을 열려고 갔다가
그새 거기 간 목적을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에 갔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앞이 막막하고
울컥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차분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서로 모르는 사이가 /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
다시 모르는 사이로 /
돌아가는 세월” 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는 목소리에 담아
우리를 나무라지요.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나 사이’ 의 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 김남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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