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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 사이

글모음(writings)/좋은 시

by 굴재사람 2024. 7. 2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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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 사이
                                 詩人 / 李生珍 (1929~  )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지난 2019년 봄

평사리 최참판 댁 행랑채 마당에서

박경리 문학관 주최로 제1회 "섬진강에

벚꽃 피면 전국 시(詩) 낭송대회"가 열렸습니다.  

 
6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낭송시가

바로 이생진(李生珍) 시인의 이 작품입니다. 


7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 낭송가의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실려 낭송된 이 시는

청중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였습니다.  

좋은 낭송은 시 속의  ‘나’ 와

낭송하는  ‘나’ 와

그것을 듣고있는 ‘나’ 를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주인인 기억이 하나 둘
나를 빠져 나가서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 
 
나는 창문을 열려고 갔다가

그새 거기 간 목적을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에 갔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앞이 막막하고

울컥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차분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서로 모르는 사이가 /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 
다시 모르는 사이로 /
돌아가는 세월” 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는 목소리에 담아
우리를 나무라지요.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나 사이’ 의 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 김남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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