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울 시내 곳곳에서 사과나무꽃을 볼 수 있다. 가수 이용의 노래 ‘서울’의 가사,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때문인듯 특히 종로구에 많다. 사과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떠오르는지? 과일꽃 자태도 웬만한 원예종 꽃이나 야생화 못지 않다. 특히 요즘 피어 있는 사과꽃, 배꽃, 모과꽃 등은 꽃도 어여쁜데다 얘기거리도 참 많은 꽃이다.
요즘 핀 사과나무꽃을 보면 하얀 5장의 꽃잎에 황금색 꽃술이 달렸다. 꽃봉오리는 처음엔 분홍색을 띠다 활짝 피면서 흰색으로 변하는데, 아직 분홍색이 남아있을 때가 정말 예쁘다. 사과꽃은 향기가 참 좋다. 이 향기를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잘 익은 사과가 가득 담긴 박스를 처음 개봉할 때 나는 냄새와 비슷하다. 맑고 싱그러운 향기다.
은희경 소설 ‘새의 선물’에선 사과꽃 향기가 조숙한 소녀의 풋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이 소설은 남도의 소읍에 사는 소녀가 주인공인 성장소설이다. 삼촌의 서울 친구인 허석이 내려왔을 때 가족들은 밤 영화를 본 다음 과수원길로 산책을 간다. 풋사랑의 시작이다.
<과수원이 가까워질수록 꽃향기가 진해진다. 사과꽃 냄새다. 삼촌과 허석이 앞서서 걷고 그 뒤를 나와 이모가 따라간다. 어두운 숲길에는 정적이 깃들어 있고 사과꽃 향기와 풀벌레 소리, 그리고 하늘에는 별도 있다. (중략) 나에게 느껴지는 것은 다만 허석, 그와 밤 숲길과 사과꽃 향기뿐이다. 사과꽃 향기에 쌓여 그와 내가 봄 숲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과꽃. 아직 분홍색이 남아 있을 때가 가장 예쁘다.
과수원의 사과나무꽃은 이 소설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나’는 허석이 그리우면 8월의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풋사과가 매달린 과수원길을 한없이 걷는다. 풋사랑이라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지만….
공지영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에는 ‘배꽃 같은 여자’ 소희가 나온다. 이 소설은 신부 서품을 앞둔 젊은 수사(修士) 요한이 세속 여성과 사랑에 빠져 방황하다 성숙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요한 수사가 소희를 처음 만나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불암산, 요셉 수도원, 흰 배꽃… 그래, 그녀의 이름을 여기에서 처음 발음해보기로 한다. 김소희, 소화 데레사.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헐렁한 완두콩빛 스웨터에 무릎까지 오는 나풀거리는 흰 스커트를 입었고 납작하고 세련된 연둣빛 데크슈즈를 신고 있었다. 내가 멀리서 그 아름답고 하늘하늘한 실루엣을 처음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다른 수사와 배꽃 사이를 걷고 있었다.>
배꽃. 흰 꽃잎에 검은 꽃밥이 조화를 이룬 꽃이다.
그 뒤로 검은 수도복을 입었지만 29살 젊은이인 요한 수사에게 흰 배꽃 사이로 걸어가던 그녀가 자꾸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요한 수사는 아빠스 지시에 따라 소희의 논문 연구를 도와주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며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요한 수사는 신부 서품을 앞둔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더구나 소희에게는 어릴 때 약속한 헌신적인 약혼자가 있었다. 결국 소희는 떠나고 요한은 이별의 고통을 겪는다.
배꽃은 흰색의 꽃잎 5장에 검은 꽃밥이 조화를 이루어 깨끗하면서도 품격을 느끼게 하는 꽃이다. 은은한 향기도 좋다. 특히 5월 산들바람에 하얀 꽃잎들이 흩날리는 모습은 환상적이다. 매력적인 여성의 상징으로 손색없는 꽃이다.
이 소설을 읽고 배꽃이 필 무렵 불암산 기슭에 있는 요셉 수도원(경기도 남양주)에 가보았다. 나풀거리는 흰 스커트를 입고 흰 배꽃 사이를 걷는 아가씨는 볼 수 없었지만 드넓은 과수원에서 마침 절정에 이른 햐얀 배꽃을 원없이 볼 수 있었다.
요즘 모과나무꽃도 한창이다. 모과는 무엇보다 울퉁불퉁 못생긴 것이 특징이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까지 있다. 그러나 꽃에 이르면 상황이 180도 다르다. 진한 분홍색으로 피는 모과꽃이 뜻밖에도 아주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향기까지 아주 좋다. 과일꽃 중에서 여왕을 뽑는다면 아마 모과꽃이 차지할 것 같다. 모과나무는 수피가 아름다운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매끄러운 줄기에 있는 얼룩 무늬가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울 정도로 인상적이다.
모과나무꽃. 진한 분홍색 꽃이 뜻밖에도 아주 매혹적이다.
과일나무는 과실만 아니라 예쁜 꽃들도 선사하는 고마운 나무들이다. 봄이 다 가기 전에, 과일나무가 있으면 꼭 한번 꽃과 눈을 마주쳐 보기 바란다.
[김민철의 꽃이야기] 불두화·백당나무를 나란히 심은 이유는? (0) | 2021.05.08 |
---|---|
왕보리수나무 꽃 (0) | 2021.05.02 |
꽃마리 (0) | 2021.04.22 |
[김민철의 꽃이야기] 이번주 카덴차는 복사꽃이 연주해요 (0) | 2021.04.14 |
[김민철의 꽃이야기] 이 꽃만 알면 당신도 제비꽃 박사 (0) | 2021.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