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이 순백의 꽃망울을 터뜨렸다. 3월의 중심에 가까워져 오니 봄꽃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엔 냉기가 여전하지만, 눈길 닿는 곳마다 꽃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완연한 봄이다. 그 많은 꽃 중에도 3월을 대표하는 꽃을 곱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너도바람꽃을 꼽을 것이다. 같은 장소라면 눈을 녹이고 피는 복수초(얼음새꽃)보다도 먼저 피는 부지런한 꽃이 너도바람꽃이다.
바람꽃은 종류가 아주 많다.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것만도 10여 가지나 된다. 너도바람꽃으로 시작하여 변산바람꽃, 꿩의바람꽃, 만주바람꽃, 홀아비바람꽃, 회리바람꽃, 쌍둥바람꽃, 숲바람꽃, 들바람꽃, 남방바람꽃, 세바람꽃 등이 순서를 지켜가며 피어난다.
그리하여 야생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름다운 꽃으로 바람꽃을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
비단 일찍 피어 봄을 알리는 꽃이어서가 아니라 순결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은 여느 꽃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도 바람꽃은 우리의 전통적 감성에서 온 이름이 아니라는 것은 좀 슬픈 일이다. 바람꽃이란 이름은 서양의 이름에서 차용된 것이다. 바람꽃의 영어식 이름은 wind-flower이다. 이는 이 꽃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된다.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아내인 꽃의 여신인 플로라 몰래 여종인 아네모네와 바람을 피우다 들키는 바람에 플로라의 노여움으로 여종 아네모네는 꽃이 되고 만 것이다. 아네모네는 라틴어로 '바람의 딸'이란 뜻이다. 그래서일까. 바람꽃이 필 때면 아네모네를 잊지 못하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처럼 바람이 멈추지 않고 연신 꽃대를 흔들어 댄다. 우리 땅에 피는 꽃의 이름에 서양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조금은 슬픈 일이지만 바람을 타는 꽃을 보고 있노라면 선뜻 바람꽃보다 근사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난주엔 남양주의 세정사 계곡으로 바람꽃을 보러 다녀왔다. 북풍이 성가시긴 해도 햇살은 따뜻하고 겨우내 얼어붙은 얼음장 사이로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소리가 제법 경쾌했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며 여기저기 눈길을 놓아도 바람꽃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제풀에 지쳐 바위에 걸터앉아 다리쉼을 하며 무심코 시선을 준 곳에 한 송이 바람꽃이 피어있는 게 아닌가. 찬찬히 주위를 살피니 하나 둘 바람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너도바람꽃이다. 아직 동안거를 풀지 않은 결빙의 계곡에서 너도바람꽃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나중에 꿩의바람꽃까지 만난 것은 덤으로 얻은 행운이었다.
바람꽃은 주변의 나무들이 잎을 내어 그늘지면 광합성을 못하게 되어 씨앗을 맺을 기화가 사라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먼저 꽃을 피워야만 한다. 꽃받침은 꽃을 돋보이게 받쳐주고 열매를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갖출 만큼 여유가 없는 바람꽃은 꽃받침을 아예 꽃잎의 역할을 하도록 진화시켰다. 따로 꽃받침을 만드는데 영양분을 헛되게 쓰지 않고 열매를 맺으려는 바람꽃의 특별한 생존전략이자 지혜다. 덕분에 우리는 얼음 덮인 계곡에서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배런 밥티스트는 '나는 왜 요가를 하는가'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곳에 도달하려면 예전과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전과 같은 행동은 전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말을 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어제와는 다른 말과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하지 않으면 결코 우리의 삶은 반복되는 일상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꽃을 찾아다니며 공부하다 보면 자연의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내가 야생화에 빠져드는 이유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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