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는 인생관이 있습니까?
보는 것은 세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이를 ‘견見, 시視, 관觀’이라고 합니다.
견은 견해를 갖고 보는 것이고,
시는 어떤 방향의 시각을 갖고
보는 것이고,
관은 통찰력을 가지고 보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관은 관념을 말합니다.
지식을 갖게 되면서 관념을 갖게
됩니다.
습관에 의해서도 관념이 만들어집니다.
내 삶을 바라보는 관념, 가치가
나의 인생관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열정과 신념으로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가슴 뛰는 인생관을
창조하세요!
선택하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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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의도하지 않고 보는 것을 ‘見(견)’이라 하고, 자세히 보는 것을 ‘視(시)’, 목적을 가지고 어떤 것을 자세히 보는 것을 ‘觀(관)’이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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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 중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약 80%에 달할 정도로 절대적이다. 그만큼 눈은 인체에서 작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최고의 정보수집기관이며 거의 모든 일상을 지배한다. 시각을 통해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칠정(七情)을 느끼고 시각의 도움으로 학습과 경험축적, 원활한 경제활동과 창의적 사고를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는 방법은 각각 다르며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의미에 차이가 있다. ‘눈’은 한자로 目(목)과 眼(안)이 있다. 목(目)은 눈의 겉모양을 본떠 세로로 표시한 상형한자로 눈동작이나 상태를 표현하는데 활용되고 안(眼)은 눈의 외양뿐 아니라 보는 일까지 확장된 개념으로 그칠 간(艮)이 음과 뜻의 역할을 한다. 즉 눈으로 볼 수 있는 범위는 한정돼 있다는 의미가 포함돼있다.
‘보다’와 관련된 한자로는 見(견), 觀(관), 看(간), 視(시), 覽(람) 등이 있는데 공통적으로 目(목)이라는 글자가 포함돼있다.
見(견)은 사람[儿(인)]이 눈[目(목)]을 뜨고 멀리 내다보는 모습이다. 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을 보는 것이다. 見學(견학), 見聞(견문), 見物生心(견물생심) 등으로 활용된다. 觀(관)은 ‘자세히 보다’라는 의미다. 황새(雚)가 먹이를 잡기 위해 바라보는[見(견)]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觀覽(관람), 觀光(관광), 觀察(관찰) 등의 관련 한자어가 있다.
看(간)은 눈 위에 손을 얹고 살펴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手(손)+目(눈)의 구조다. 看病(간병), 看過(간과), 看破(간파)하다 등의 용례가 있다. 視(시)는 ‘시(보일 시)와 견(볼 견)’이 합쳐진 구조로 ‘의식적으로 자세히 본다’는 의미다. 視覺(시각), 視力(시력), 監視(감시), 無視(무시) 등으로 활용한다.
覽(람)은 ‘監(볼 감)과 見(볼 견)’의 합으로 監(감)은 ‘人(사람)이 皿(그릇)에 담긴 一(잔잔한 물)에 비친 모습을 눈을 크게 뜨고[臣] 살펴본다’는 함의다. 보기로는 觀覽(관람), 閱覽(열람), 遊覽(유람) 등을 들 수 있다.
‘보다’라는 의미의 미묘한 차이는 영어에서도 다양하게 표현된다. ‘see’ 는 눈으로 보고 비로소 무엇을 의식함을 의미한다. 특정방향으로 바라볼 때는 ‘look(쳐다보다)’, TV를 시청한다고 표현할 때는 ‘watch(시간과 관심을 기울이며 지켜보다)’, 무엇을 관찰하다는 ‘gaze(응시하다)’를 사용한다.
이밖에도 ‘stare(비우호적으로 또는 놀라서 빤히 쳐다보다)’ ‘glimpse(언뜻 보다)’ ‘glare(쏘아보다)’ ‘glance(재빨리 힐끗 보다)’ ‘witness(목격하다)’ ‘spot(알아채다)’ 등 보는 방법에 따라 적절한 어휘로 의미를 표현한다.
한편 불교에서는 수행정도에 따라 볼 수 있는 다섯 가지 눈(五眼)이 있다고 설명한다. 첫 번째는 ‘육안(肉眼)’이다. 육신의 눈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볼 수 있다. ‘천안(天眼)’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환히 보는 신통한 마음의 눈이다. 셋째 ‘혜안(慧眼)’은 모든 집착과 차별을 떠나 진리를 밝게 보는 지혜의 눈이다. 넷째 ‘법안(法眼)’은 모든 현상의 참모습과 모든 법을 관찰하는 눈이다. ‘불안(佛眼)’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부처의 눈이다.
육안으로 보이는 현상만이 진리가 아니며 사람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은 바로 마음의 눈인 ‘心眼(심안)’이다. 안과의사는 육안의 병을 치료하는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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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에는 보는 것에 세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이를 견시관(見視觀)이라 한다. 한문으로 `볼 견(見)`은 보기는 보는 데 눈뜨고 있으니 보이는 것이다. 영어의 `see`에 해당한다. `견(見)`은 눈(目)을 크게 뜬 사람(人)의 눈으로 외부의 사물이나 현상이 보이는 것을 형상화한 한자다. `견(見)`은 눈앞의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견물생심(見物生心)이 말해주듯이 보고 싶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앞에 있어서 보이는 것이다.
`견(見)`은 또한 자기방식대로 보는 것이다. 자기 방식대로 본 의견과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남의 의견과 주장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면서 견해차(見解差)가 발생한다. 견해의 다름은 틀림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의견은 옳고 타인의 의견은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비해 `볼 시(視)`는 어느 차원에서 보느냐의 문제이다. `시(視)`는 `견(見)`과 `시(示)`가 결합해 어떤 대상을 보여 주거나 보는 것을 말한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 시각차(視角差)가 발생하는 이유는 보는 각도(角度)가 다르기 때문이다. 장님 여럿이서 코끼리를 만진다는 군맹무상(群盲撫象)이 시사하듯 코끼리를 어느 각도에서 어떤 부위를 보면서 만지느냐에 따라 코끼리에 대한 시각차가 발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관(觀)`은 중심에서 보는 것이다. `볼 관(觀)`은 큰 눈을 가진 수리부엉이가 목표물을 응시하듯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을 무심코 시각적(視覺的)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서 자세히 응시(凝視)하면서 꿰뚫어보는 것이다. 관형찰색(觀形察色)이라는 사자성어가 말해주듯이 `관(觀)`은 마음을 떠보기 위해 얼굴빛을 자세히 살펴보거나 잘 모르는 사물(事物)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는 사물이나 현상의 겉모습만 보고 그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물을 보려면 눈동자에 초점을 맞추고 봐야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보면 볼수록 다른 것은 보지 못하는 딜레마가 생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눈동자가 없어야 전체를 볼 수 있다. 그래서 `관(觀)`자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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